2019년 한국영화 속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몇 년 사이 영화계 안팎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대체로 주변부에 머물렀거나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편파적으로 그려졌던 모습에서 탈피해 달라진 시대에 부합하는 여성상을 보여주고,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여성 영화인이 늘어나길 원한다.

 

마블은 최초로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을 선보였고, [알라딘]은 원작보다 능동적인 자스민 공주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영화는 어떨까? 최근 한국영화는 주로 독립영화계에서 여성 감독과 여성 서사의 작품이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상업영화에서 여성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2019년 개봉작 중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극한직업]은 해체 위기를 맞은 마약반 형사 5인으로 뭉친 배우들의 호흡이 돋보이는 영화다. 마약반을 책임지는 좀비 반장 류승룡을 중심으로 이하늬, 진선규, 이동휘, 공명이 개성 넘치는 형사들로 분해 감칠맛 나는 코미디를 선보인다.

 

극중에서 이하늬는 마약반 서열 2위 장형사 역을 맡아 거침없는 입담과 강한 액션을 소화하며 5인방 중에서도 남다른 인상을 전한다. 마약반의 유일한 여성 형사임에도 주변 동료 형사에게 의존적이거나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예측불허의 캐릭터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후반부 마약조직과 결전에서는 숨겨왔던 격투 실력을 발휘하며 에이스 형사 존재감도 한껏 과시한다.

 

반면, 고반장(류승룡)의 아내로 출연한 김지영은 주변부 캐릭터임을 감암해도 전형적인 아내의 모습에 그쳐 아쉽다. 한 번씩 예리한 촉으로 남편의 수상한 사업에 의심을 던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년 반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닳고 닳도록 본 주부의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가는 가족을 통해 한국사회를 풍자한 [기생충]은 특정 성별에 치우치지 않는 고른 배우진으로 눈길을 끈다. 송강호, 장혜진, 최우식, 박소담이 전원 백수 기택네 가족을, 이선균, 조여정, 정지소, 정현준이 부잣집 박사장 가족을, 그리고 이정은과 박명훈이 숨은 가족으로 등장해 코미디부터 서스펜스까지 장르를 아우르며 색다른 긴장을 만들어낸다.

 

여성 등장인물 중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는 연교(조여정)와 문광(이정은)일 것이다. 순진하고 허술하며 사람 잘 믿는 연교는 기택네 가족의 실체를 알아채지 못해 쉽게 이용당한다. 악의는 없지만 뚜렷한 편견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기택네 가족과 관객을 뜨끔하게 허를 찌른다.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은 시의적절한 존재감으로 가족 희비극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다. 연교를 감쪽 같이 속인 기택네 가족의 계획에 밀려 한순간에 버림 당하지만, 누구도 생각 못한 순간 장르 자체를 변주하며 등장해 날 선 긴장감으로 압도한다.

 

충숙(장혜진)과 기정(박소담)도 당당하고 영리한 모습으로 가난으로 붕괴된 가족 내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대등한 관계를 갖는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억지감동과 분노유발 캐릭터 없이 오직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청춘의 탈출기를 그린 [엑시트]가 승승장구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엑시트]의 성공 요인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윤아가 연기한 의주의 의외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의주는 기존 재난 영화에 숱하게 등장했던 누군가의 구원이 필요한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고자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주변 소도구를 활용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탁월한 센스와 용남 못지않은 강한 체력으로 끝까지 분투한다.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상황이 되자 불편한 유니폼 치마를 버린 점도 현실적이다. 또한 끈질기게 치근덕거렸던 점장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모습은 짜릿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미지: (주)쇼박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첫 승리를 그린 영화 [봉오동 전투]는 개봉 전 환경 훼손 논란에도 손익분기점을 향해 순항 중이다. 황해철(유해진), 이장하(류준열), 마병구(조우진)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이름 없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독립군 자현(최유화)과 춘희(이재인)는 [봉오동 전투]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이나 서사에 녹아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비판이 있다. 굳이 없어도 흐름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자현은 3.1 운동 후 투옥되었다 살아남았다는 캐릭터의 강인함을 보여줄 시간이 부족했고, 춘희는 일본군의 만행을 보여주는데 제법 많이 할애되어 배우들의 열연에도 아쉬움을 남긴다.

 

 

이미지: (주)쇼박스

신입 주식 브로커가 성공을 위해 위험한 거래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 []은 류준열의 원맨쇼에 가까운 영화다.

 

원진아가 연기한 박시은은 주인공 일현이 일하는 동명증권의 유일한 여성 브로커다. 여의도 증권가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강단 있는 성격의 인물이지만, 당차게 자신의 길을 가는 매력을 느끼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어느 순간 일현의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된 연인 역에 머물러 버린다.

 

 

이미지: (주)키위미디어그룹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조직 보스와 열혈 형사가 뭉친다. [악인전]은 참신한 설정에 마동석표 액션을 더해 범죄 오락 영화의 쾌감을 전한다.

 

다만, [악인전]은 어둡고 거친 범죄 세계를 담는데 주력하느라 캐릭터의 성별 균형 감각은 제로에 가깝다. 장동수(마동석)와 정태석(김무열)과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친 후 살인범 K(김성규)에게 희생된 여학생이 전부라 해도 무방하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말을 모으며 사전을 편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과자 출신의 까막눈 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해 [허스토리]와 [미쓰백]에서 친숙하면서도 개성 강한 연기를 보여준 김선영은 조선어학회의 유일한 여성 구자영을 연기한다. 구선영은 학회의 비밀 서고와 사무실이 있는 문당책방을 운영하며 까막눈 판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인물이지만, 판수와의 러브라인을 배제하는 등 단순히 감초 캐릭터로 소모되지 않는다. 김선영은 얼마 전 황금촬영상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증인]은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자폐아 학생을 만나면서 내적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자폐 학생 지우(김향기)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변호사 순호(정우성)를 변화시키는 인물이다. 변호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순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져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분히 외부인 순호의 시선이 반영되어 비치지만, 속물 어른 순호가 지우와 소통하며 반성하고 변화하듯이 관객도 때 묻지 않는 순수함에 자연스레 이끌리고 감화된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사바하]는 신흥 종교 집단을 쫓던 박목사(이정재)가 의문의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를 그린다. [검은 사제들]로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 장재현 감독답게 보다 깊어진 세계관을 선보이며 오컬트 장르의 매력을 전한다.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에 이어 [사바하]는 이재인이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인다. 비극적인 운명으로 태어난 쌍둥이 자매로 분해 시작부터 기괴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금화는 이야기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박목사와 수상한 미스터리를 쌓아가는 나한과 달리 신경을 긁는 공포와 불쾌감으로 관객을 옥죄며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의구심을 강화한다.

 

 

이미지: TCO(주)더콘텐츠온 , (주)메리크리스마스

[내안의 그놈]은 관객을 웃긴다는 목표를 향해 직진한다. 왕따 고등학생과 조폭 보스의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황당한 에피소드를 뻔뻔하게 밀어붙이며 웃음을 자아낸다.

 

아마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판수(박성웅)의 영혼이 빙의된 동현(진영)과 뜻하지 않는 유사 로맨스를 선보이는 미선(라미란)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순간적으로 당황해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려는 모습에서 예측불허의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또한 홀로 아이를 키운 미혼모라는 설정을 신파 요소를 제거하고 솔직하고 쿨하게 그려내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다분하다. 진영과 미묘한 긴장선을 이어가는 라미란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압권이다.

 

 

이미지: (주)쇼박스

[뺑반]은 뺑소니 전담반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공효진, 류준열의 만남으로 관심을 모았으나 당시 극장가를 강타한 [극한직업]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개성 강한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미흡한 서사를 들 수 있다. 특히 뺑소니 전담반으로 좌천된 엘리트 경찰 은시연(공효진),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윤지현 과장(염정아), 경찰대 수석 출신의 뺑소니 전담반 리더 우선영 계장(전혜진)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쉬울 정도로 극중에서 주인공 민재(류준열)를 위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친다.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걸캅스]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여성 형사 콤비를 내세워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강력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범죄 오락 영화의 익숙한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여성을 내세운 시도가 무색하지 않게 다루는 범죄도, 이를 풀어가는 여성들도 현실에 밀착해 있다.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디지털 성범죄, 남성 중심 사회에서 결혼으로 인한 경력 단절 등 여성이라면 수긍할 법한 설정이 공감대를 형성한다. 과거의 전설의 형사 미영(라미란)과 민원실로 밀려난 형사 지혜(이성경)가 남자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를 답습한다는 지적도 있으나, 1993년 [투캅스]가 선보인 후 이제야 [걸캅스]가 나온 걸 감안하면 시도는 인정받아야 한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사자]는 오컬트의 외피를 쓴 히어로 영화에 가깝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후 신을 불신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격투기 선수 용후(박서준)가 구마사제 안신부(안성기)를 만나 특별한 힘으로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 새로울 건 없지만 격투기 선수라는 배경이 구마 액션이라는 신선함을 만들어낸다.

 

갈팡질팡 갈등하며 느릿하게 각성하는 용후의 서사가 대부분인 영화에서 악의 존재감과 주변 캐릭터의 활약은 미미하다. 유사 부자관계를 이루는 안신부를 제외하면 딱히 인상적인 캐릭터가 없다. 악에 빙의되는 여성과 안신부를 돕는 수녀가 등장하지만, 서사에 뚜렷한 인장을 남기기에는 역할은 너무 한정적이다.

 

 

이미지: (주)NEW

[나의 특별한 형제]는 실화에 영감을 받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두 남자가 한 몸처럼 살아오며 끈끈한 우애를 나누는 이야기를 그린다.

 

신하균과 이광수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세하와 동구로 열연을 펼치는 영화에서 이솜이 연기한 미현은 자연스럽게 정직한 시선으로 두 남자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게 이끈다. 세하와 동구와 나누는 우정을 통해 장애를 장애로 보지 않는 시선을 보여주고,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고자 애쓰며 팍팍한 자취생활을 하는 취준생이라는 설정은 청춘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미지: (주)NEW

[생일]은 세월호 사건 이후 남겨진 가족들에 주목한다. 국민적인 트라우마를 안긴 사건을 다루는 만큼 조심스러운 태도로 가족들이 슬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며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아빠 정일(설경구)과 그날 이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도 놓지 못하는 엄마 순남(전도연)이 뒤늦은 재회 이후 아들의 생일을 두고 갈등하는 서사를 주축으로 삼는다. 영화에서 순남이 느끼는 일상적인 슬픔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거나 혹은 외면하고 싶었던 유가족의 아픔을 대변하며, 전도연은 섬세한 연기로 절절한 슬픔을 그려낸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인이면서도 이제껏 제대로 다룬 적 없는 유관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서대문 감옥 8호실에 갇혀 보낸 1년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대다수의 영화가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갔다면, [항거]는 유관순과 8호실 여성이 극의 주체가 되어 진행된다.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등 배우들이 일제의 폭거에 당당히 맞선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 그리고 뜨거운 항일 의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진심 어린 태도가 통했기 때문일까. 3.1절을 앞두고 개봉해 나흘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며 110만 관객이 넘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이미지: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주)콘텐츠난다긴다

조폭 보스가 선거에 나선다?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은 웹툰을 원작으로 갱생을 결심한 조폭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강소현(원진아)은 장세출(김래원)이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데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다. 철거 용역 현장에서 만나 강단 있는 성격에 맞게 일침을 가했을 뿐인데, 그 이후로 새 사람이 되려는 장세출이 주변을 계속해서 맴돈다. 초중반만 해도 ‘썸’의 기운이 묘하게 오가는 소현과 세출의 관계는 대등하게 흘러가지만, 아쉽게도 막판에 무너진다. 경쟁 조직 보스 광춘(진선규)에게 납치당해 세출의 도움이 필요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것. 범죄영화에서 여성을 볼모로 삼는 건 이젠 너무 식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