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드라마에서 찾아본 ‘아키라’의 흔적

 

할리우드 영화/드라마에서 찾아본

‘아키라’의 흔적

 

by. 빈상자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명작 애니메이션 <아키라>가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88년 7월 일본에서 처음 개봉된 이후, 이 작품이 심상치 않다는 풍문이 당시 일본 영화 개봉이 금지된 한국까지 퍼졌다. 지금 같으면 개봉 몇 달만에 어둠의 경로로 급속히 그리고 손쉽게 퍼졌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던 시기다.

그렇게 번거로운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아키라>의 복사본 VHS를 구했고, 몇 번을 복사해서 빗줄이 수없이 생겨도 감격하며 봤다. 자막이 있으면 천운이었고, 자막도 없이 눈치코치로 봐야 되는 상황에서도 감흥은 줄지 않았다. 그러다 간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라도 나오면 탄성이 터졌다. “빳데리가!”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1968년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출간되며 사이버펑크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그 이후로 70년대에 문학을 중심으로 팽창하던 사이버펑크 문화는 80년대 들어와서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시각화의 정점을 이룬다. 그 하나가 1982년의 실사 영화 <블레이드 러너>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1988년 애니메이션 <아키라>였다.

 

할리우드의 <블레이드 러너>와 재패니메이션 <아키라>는 뒷날 수많은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업적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지점에서 극과 극을 찍는다. 특히 일본의 전통음악과 전통사상, 만화답지 않게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아키라>의 비주얼과 플롯 앞에서 서양인들은 어리둥절 했다. 할리우드는 <아키라>를 실사 영화로 만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면서도 <아키라>가 나온 지 거의 30년이 다 된 지금에도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아키라>의 완전체 재현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 조각조각을 빌어와서 실현해보는 꿈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아키라>의 공만은 아니겠지만, <아키라>의 향기가 특히 강한 할리우드 영화와 미드의 장면들을 모아봤다.

 

 

1. 물풍선처럼 터지다 – <리전, 2017>

항상 카네다의 도움을 받고 자라며 열등감에 쌓여있던 데츠오는 고속도로에서 26호 소년 타카하시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데츠오에게 심상치 않은 에너지를 발견한 군대는 데츠오를 상대로 실험을 시작한다. 각성한 이후로 자신의 새로운 힘을 자각한 데츠오는 병실을 탈출해 3명의 아이들이 있는 ‘A-Room’으로 가려고 한다. 데츠오의 병실 문이 파손된 것을 안 과학자 한 명과 군인 두 명이 테츠오에게 다가오는데…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데츠오는 자신의 길을 막고 나타난 3명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물풍선처럼 터뜨려버린다. 좀 전까지만 해도 물컵이나 당기는 정도인 것 같았던 데츠오의 능력이 그 사이 엄청나게 각성했음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다. 신체의 흔적이라곤 천장에 매달린 손밖에 보이지 않는 끔찍한 풍경은 마치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라도 다녀간 잔혹한 현장 같다.

 

<이미지: FX>

 

2017년 초에 첫 시즌을 마친 미드 <리전>은 찰스 자비에의 아들인 데이비드 할러(리전)가 주인공이다. 찰스 자비에의 아들답게 그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다. 텔레파시나 시공간 왜곡은 기본, 수많은 자아를 가진 다중인격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키라> 아이들의 중심 능력인 염력도 물론 탑재했다. 그런 데이비드 할러의 능력은 막강하다. 어찌나 강한지 일당백 정도가 아니라 혼자서 군단의 역할도 할 수 있어 사람들은 그를 ‘군단(legion)’이라고 부른다.

 

<이미지: FX>

 

<리전> 파일럿에서 그의 막강한 능력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신체접촉을 하면 몸과 정신이 잠시 바뀌는 데이비드의 여친 시드의 능력을 통해 데이비드의 몸에 잠시 시드의 정신이 들어오게 되는데, 데이비드의 능력을 통제할 수 없었던 시드는 실수로 데이비드의 친구 레니를 죽이게 된다. 테츠오가 물풍선을 터뜨렸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엄청난 능력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그 심각성을 <리전>은 <아키라>와 비슷한 그림과 충격요법으로 경고한다.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좌) / 마블코믹스 (우)>

 

<리전>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지만 엑스맨 중에는 테츠오에게 오마쥬를 바친 캐릭터가 있다. 제로(우에도 켄지)는 도쿄 출신으로 기계와 유기체가 섞인 하이브리드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쭉쭉 뻗어 나아가는 가제트 팔의 모습이 테츠오를 꼭 닮았다. 만일 <리전>에 제로가 등장해서 데이비드와 대결한다면, 끔찍하고 기괴한 장면들의 대잔치가 펼쳐지지 않을까.

 

2. 염력 대결 – <다크 시티, 1998>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아키라를 만나기 위해 건설 중인 도쿄 스타디움으로 간 테츠오. 마치 서양의 슈퍼맨을 비꼬고 싶은 듯 빨간 망토를 걸치고 자신의 힘에 취해 폭주하는 테츠오를 막을 수 있는 건 3명의 아이들 뿐이다. 이에 아이들은 힘을 합쳐 케이의 몸을 빌려 스타디움에서 테츠오와 대결을 벌이게 된다. 보호막을 형성하거나 물건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건물을 모래성처럼 뒤엎을 수 있는 가공한 염력을 가진 테츠오와 케이는 스타디움과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미지: 뉴라인 시네마>

 

1999년 <매트릭스>, 2000년에는 재능인들이 넘치는 <엑스맨> 시리즈가 시작된 이후로 스크린에서 블록버스터급으로 터지는 염력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대작들에 앞서 먼저 초능력자들의 염력 대결을 화려하게 구사한 영화가 있다. 1998년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외면받고 평론가들도 시큰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받고 있는 ‘저주받은 걸작’ <다크 시티>이다.

<다크 시티>가 <아키라> 이후에 염력을 묘사한 최초의 영화이자 가장 잘 묘사한 영화라고 하기엔 어렵다. 하지만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이 <다트 시티> 최후의 대결 장면을 <아키라>의 테츠오와 케이의 대결 장면에 대한 오마쥬라고 떠들고 다녔다. <아키라>보다 ‘드래곤 볼’이 익숙한 세대들은 <아키라>보다 ‘드래곤 볼’에서의 일상적인 대결과 닮았다고 의견을 냈지만 프로야스 감독은 ‘드래곤 볼’은 보지도 못했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3. 대폭발 – <터미네이터 2, 1991>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아키라>에서 핵폭발과 같은 대폭발이 두 번 일어난다. 영화 속에서 ‘과거’의 시점이 되는 1988년에서 한 번, 그리고 ‘현재’인 2019년에서 또 한 번. 두 번의 대폭발은 <아키라>의 시작이고 또 끝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아키라>의 대폭발 장면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또 위력이 엄청났다. 80년대는 핵전쟁의 위협이 피부로 닿았던 시기였기에 당시의 충격은 더 했다.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아키라>에서 테츠오가 조금씩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 때로는 환영처럼, 때로는 꿈처럼 테츠오에게 조각조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테츠오는 병실에서 악몽을 꾸는데 꿈속에선 어린 테츠오와 가네다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뒤이어 대폭발이 일어나고 도시와 놀이터를 비롯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미지: 영화 ‘터미네이터2’ 캐롤코 픽쳐스>

 

<아키라>가 공개된 지 3년 만인 1991년 개봉된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도 대폭발이 있다. 사라 코너가 필사적으로 막고자 하는 1997년 ‘심판의 날’의 대폭발이다. 사라는 존을 데리고 멕시코로 도망가려다가 ‘심판의 날’ 악몽을 꾼다. 꿈인 데다 사라가 있는 시간인 1995년에서 보자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분명 실제 했던 역사다. 그만큼 ‘심판의 날’의 대폭발은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2029년 미래에서 왔지만 원시적인 찌르기 공격을 애용하는 T-1000은 여러 잔혹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2>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사라 코너와 놀이터의 아이들이 잿더미로 변하는 2분 남짓의 대폭발 장면이다.

대폭발을 활용하는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터미네이터 2>에선 대폭발이 파괴와 절망을 상징한다면, <아키라>는 카오스의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 시작을 할 수 있는 리셋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심판의 날’을 고대하고 있는 듯. 하긴 아키라가 강림하기 전 네오도쿄의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도시 같은 느낌이다.

 

 

4. 기묘한 능력의 아이 – <기묘한 이야기, 2016>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아키라>는 아키라를 포함한 4명의 어린아이들과 청소년인 테츠오까지, 초능력을 가진 이들은 모두 미성숙한 아이들이다. 대폭발이 있었던 1988년 이전에 군대는 네 명의 아이들이 가진 에너지를 키워 군사무기로 이용할 책략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절대 에너지를 가진 아이인 아키라의 힘을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대폭발과 같은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놀란 군대는 약물을 통해 남은 세 아이들의 힘을 통제하게 되는데 그 부작용으로 아이들은 노인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다.

 

<이미지: 에이원엔터테인먼트>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아마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이 빌려온 설정일 것이다. <아키라> 이전에도 <캐리>나 <오멘>처럼 기묘한 힘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지만, <아키라>가 선보인 이후 할리우드의 아이들은 부쩍 <아키라>의 아이들을 닮아갔다.

 

<이미지: 영화 ‘미드나잇 스페셜’ 워너브러더스 픽쳐스>

<이미지: 영화 ‘매트릭스’ 영화사마농 / 씨네클럽봉봉미엘>

 

할리우드의 ‘아키라 키드’들은 <크로니클>에서처럼 그 귀한 염력을 기껏 하늘을 날며 공놀이나 하는 재능 낭비에 열중하기도 하고, <루퍼>에서처럼 플롯을 뒤집는 반전과 깜짝쇼의 장치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영화 <미드나잇 스페셜>에서는 정부와 종교단체로부터 아이를 지키려는 부성애 끝판왕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한편 <매트릭스>는 전체적으로는 또 다른 명작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빌려온 비주얼이 훨씬 많기는 하지만, 네오가 방문했던 오라클의 집에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잠깐 등장하면서 <아키라>의 영향을 내비치기도 한다.

염력을 가진 아이를 전면에 내세워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는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다. <기묘한 이야기>는 전체적으로는 80년대 미국 문화의 각종 아이콘과 오마쥬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예쁜 빠박이 소녀 일레븐도 종종 아키라의 아이들보다는 <E.T.>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미지: 넷플릭스>

 

하지만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은 아키라의 아이들과 훨씬 더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일레븐은 외계인이 아니라 아키라처럼 정부의 실험대상이었다. 그리고 아키라에게 28호란 번호가 부여된 것처럼, 일레븐도 원래 이름 제인을 잃고 번호 ‘일레븐(011)’으로 불린다. 일레븐 역시 처음에는 염력으로 콜라 캔을 구기는 정도의 능력만 보여줬지만 점차 사람을 훨훨 띄우고 차를 뒤집더니 급기야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아키라>는 일본문화개방 이전인 1991년에 홍콩영화로 둔갑하여 <폭풍소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깜짝 개봉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곧 들통이 나는 바람에 상영은 취소되고 수입사는 면허를 취소당했다. 원작 124분에서 무려 40분이 잘려나간 채 극장에 걸렸지만, 그나마 1991년 1월 뉴코아 예술극장에서 <폭풍소년>을 본 사람은 한동안 천운을 다 쓴 행운아로 대접받았다. 이런 <아키라>를 드디어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내년이면 꼭 30주년이 되는 <아키라>, 매우 상당히 늦은 감은 있지만 죽을 때까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잃어버렸던 나의 천운을 누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