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부산국제영화제 결산⑤ (69세, 페뷸러스 外)

벌써 두 번째로 참석하게 된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날씨가 좋아 작년처럼 태풍으로 고생하지 않고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신설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 덕일 것이다.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선정된 네 편의 작품 중,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더 킹: 헨리 5세]를 통해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조엘 에저튼이 부국제를 방문해 영화제의 열기를 더했다. 아침 일찍부터 영화를 보기 위한 열정으로 모인 관객들부터, 배우를 만나기 위해 참석한 팬들까지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띤 부산국제영화제였다. 10월 4일부터 9일까지 머무르며 총 9편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관람한 영화를 정리해봤다.

니나 우 (Nina Wu) – 불필요하게 노골적이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 8년 동안 긴 무명 생활을 겪은 니나 우가 드디어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심리 스릴러.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며, 주연 배우 커-시 우가 직접 대본을 썼다고 한다. 니나는 전라의 노출 장면 요구에 오디션을 고심하기도 하고, 이후에는 원하는 연기가 나올 때까지 폭력적인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는 감독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니나는 마침내 영화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성공적으로 스타가 된다. 그때부터 니나는 정체불명의 여성에게 쫓기며 목숨을 위협당하기 시작하는데, 실제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관객마저도 혼란스럽다. 마지막에 가서야 니나가 억눌러왔던 진실이 드러나는데, 위계에 의한 성폭행 장면을 현실 고발이라고 하기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내어 불쾌함을 안긴 채 끝이 난다.

잔 다르크 (Joan of Arc) – 잔잔하게 흘러가는 명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심사위원언급상을 수상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영화.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위인 잔 다르크의 이야기로, 영국군에게 파리를 되찾으려다가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기까지 과정을 비춘다. 화면은 굉장히 정적이고 이야기도 아주 잔잔하게 흘러가며, 음악까지 조용한 뮤지컬 영화다. 독특하게도 등장인물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별로 등장하지 않지만, 묘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사운드트랙이 인상적이다. 그 외에는 같은 음절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배경음악 덕에 한층 더 정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훌륭한 그림 몇 점을 설명하는 도슨트를 영상화한 듯한 영화다. 아름다운 프랑스 건축물의 전경과 함께, 어린 나이지만 굳건한 신념을 지닌 잔 다르크의 단단한 표정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싸이코시아 (Psychosia) – 한 편의 얕은 추상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베니스 영화제 비평가 주간 초청작으로, 자살에 관하여 연구하는 빅토리아가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환자 제니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오로지 연구 목적에서 시작된 빅토리아와 제니의 관계가 점점 변화하면서, 어떻게 빅토리아의 감정이 제니에게 감화되어가는지 보여준다. 영상미는 아름답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지만, 대사와 영상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영화 속에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굉장히 난해하고 추상적이다. 그 때문에 등장인물의 특징과 서사도 상대적으로 얄팍하게 비치고 인물들의 감정선에 좀처럼 이입하기 어렵다. 좀 더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면 훨씬 인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종말 (Calm with Horses) – 익숙한 이야기 속 빛나는 연기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덩케르크], [킬링 디어] 등에서 연기력을 뽐냈던 배리 케오간을 보고 선택한 작품. 전직 권투선수였으나 현재는 데버스 가의 갱단에서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관리자 더글라스의 이야기이다. ‘한 가족’처럼 여기는 갱단과 5살 난 아들의 아빠 역할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더글라스가 처음으로 살인 지령을 받으면서 상황은 점점 극적으로 치닫는다. 이야기 자체는 국내 조폭 영화에서도 많이 접했던 소재로 특별할 것도 없이 무미건조하고 밋밋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영화 속 황량하고 거친 느낌의 아일랜드 풍경과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이다. 거친 느낌을 풍기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배리 키오건의 연기도 좋지만, 특히 주연 코스모 자비스가 죽어가면서 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롱테이크신의 연기가 눈에 띈다.

69세 (An Old Lady) – 덤덤하게 꼬집는 노년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허스토리]에서 열연을 보여주었던 예수정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임선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병원에서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69세 효정은 얼마 후 경찰에 신고하는데, 경찰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라고는 젊은 남자가 어째서 노인에게 그런 짓을 하겠느냐 하는 시큰둥한 태도뿐이다. 게다가 간호조무사는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고 말하고, 효정의 여러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져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 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다. 함께 사는 연인 동인만이 효정을 위해 애쓰지만, 그마저도 효정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처벌조차도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지만, 결국 효정은 직접 범인을 대면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며 끝을 맺는다.

[69세]는 우리 사회에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노년 여성의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를 향한 노골적인 묘사 없이도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피해자를 헤아려주지 않는 경찰의 태도와 법 제도, 피해자와 그의 행보에 대한 사회의 비뚤어진 시선을 현실적으로 꼬집으며 지적한다. 노년 여성이 겪는 소외와 어려움을 효정의 대사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덤덤하고 담백한 톤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예수정 배우의 굳건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69세]는 뉴 커런츠 부문에서 KNN 관객상을 수상했다.

와스프 네트워크 (Wasp Network) – 실제로 일어났던 간첩사건의 설명기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90년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스파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하루아침에 쿠바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비행기 조종사 르네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쿠바 무장단체에서 난민들을 돕는 일을 시작한다. 쿠바 정부의 사회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쿠바 정부의 스파이 집단 ‘와스프 네트워크’의 일원인 것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바닷가 상공의 풍경과 함께 무겁지 않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실제 사건을 보기 좋게 나열해 놓은 것 이상의 매력을 느끼기는 어렵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주연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선택했지만, 스파이 남편 때문에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역할에 한정될뿐더러 분량도 많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냥 그대로 (Just Like That) – 인도의 억압된 여성관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계급제가 남아있는 인도를 배경으로, 나이 든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인도에서 어떻게 여성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을 다룬다. 중산층 계급의 샤르마 부인은 남편이 죽자 정숙하게 살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샤르마 부인은 그럴 생각 없이 독방을 쓰고, 개인 계좌를 만들고, 미용도 즐기고 자수도 배우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 한다.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주변의 시선은 냉혹하기만 하다. 샤르마 부인부터 시작해, 세대와 계급에 따라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여성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강요하고 억압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그린다. 차분하고 안정된 톤으로 진행되는 점은 좋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의 호흡이 너무 길어 자꾸 늘어진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페뷸러스 (Fabulous) – SNS로 얽힌 세 여성의 우정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 ★★★☆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하게 1세대 유튜버인 멜라니 샤르본느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영화 속에 녹여내어 더욱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유명 작가가 되고 싶은 로리와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엘리자베스가 SNS 스타 클라라와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각자의 이익 때문에 시작된 관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우정은 진짜가 되는데, 로리와 클라라의 상황이 서로 역전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 만다. 그러나 큰 갈등을 겪어도 이들은 여성의 연대 안에서 진짜 우정의 관계로 다시 뭉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SNS상의 문제점을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지적하면서도 밝고 통통 튀는 느낌으로 그려내어 누구나 가볍고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이번 부국제에서 BNK부산은행상을 수상했다.

싱어롱: 알라딘 (Aladdin) – 부국제에서도 꺼지지 않는 흥겨움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 에디터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체류 기간을 늘린 이유는 내한하는 배우들이 아닌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1255만 관객을 기록하며 올해 극장을 흥으로 채웠던 디즈니의 실사 영화 [알라딘]이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특별 이벤트로 [알라딘] 싱어롱을 준비했다. ‘원 점프 어헤드’만을 제외한 총 다섯 곡의 가사가 한글 발음으로 제공되었고, 다 함께 노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뮤지컬 배우들이 참석해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덕에 주저하는 사람들 없이 모두 즐겁게 싱어롱에 참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