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부산국제영화제 결산①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야구소녀 外)

올해 영화제는 ‘신의 한 수’가 빛났다. 개막식 하루를 앞두고 태풍이 불었지만 영화제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고, 해운대 비프빌리지를 포기하고 영화의전당으로 모든 행사를 옮긴 선택이 결론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게 했다. 그런 기운을 받았기 때문일까? 올해 본 작품들도 운 좋게 다 좋았고, 몇몇 작품은 인생 영화로 다가왔다. 영화제 첫 주말에는 영화 보랴, 행사 가랴, 술 먹으랴, 하루 4시간도 자지 못해 “영화제가 사람 잡네”라는 볼멘소리도 했지만, 폐막을 앞에 두고 보니 너무나 아쉬운, 한 가을밤의 꿈같다. 그래도 남는 건 추억과 영화뿐. 그동안 봤던 작품들을 간단한 리뷰로 남겨 추억을 다지고,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를 기다려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The Truth) – 일본을 가든, 프랑스를 가든 고레에다는 고레에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해외 진출작이다. 프랑스 국민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를 모녀 관계로 캐스팅하고, 에단 호크까지 가세하며 다국적 프로젝트로 주목받았다. 규모가 커진 만큼 걱정도 컸다. 첫 번째로 “[어느 가족]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더 이상 영화적 성취가 없으면 어떡하지?”, 두 번째이자 가장 염려스러웠던 부분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이야기가 문화와 언어가 바뀌어도 통할 수 있을까?”였다.

다행히도 이 같은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30분 정도만 보고 있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표 영화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철천지 원수까지는 아니지만 함께 있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모녀에게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때는 몰랐던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화해의 손짓을 취한다는 점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영화와 궤를 같이한다. 위트 있는 유머와 사랑스러운 캐릭터, 갈등과 위기가 있지만 모든 것을 감싸는 따뜻한 시선은 마치 프랑스판 [걸어도 걸어도]를 보는 것 같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가족애’라는 보편성이 지구 어디에도 통하는 것처럼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올해 부산에서 본 작품 중 단연 최고다.

말도둑들. 시간의 길(The Horse Thieves. Roads of Time ) – 카자흐스탄판 감성 웨스턴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는 형형색색으로 물든 영화의전당 레오파드를 담았다. 저마다 색이 다른 아시아 영화들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함께하는 의미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카자흐스탄과 일본이 합작으로 만든 [말도둑들. 시간의 길]은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개막작이다. 말도둑들을 만나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웨스턴 영화의 말 수 적은 영웅처럼 등장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카자흐스탄판 웨스턴이라고 할 정도로 웨스턴 장르의 익숙한 공식을 따르면서도 카자흐스탄의 문화와 정서가 짙은 감성을 자아낸다. (개막작)

디아파종(Diapason) – 죄와 벌 사이, “지금 이란은?”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디아파종]은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이란 영화다. 의대 입학을 준비 중이던 딸이 친구의 오빠에 의해 죽게 되자 소녀의 엄마가 모든 것을 걸고 죄를 지은 그를 사형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9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사형제도 찬반 논란을 비롯해 빈부격차, 여성차별 등 이란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진행되는 사회문제가 고스란히 담았다. 특히 이란은 사형제도가 있지만 피의자를 사형시키기 위해서는 피해자 측에서 피의자가 죽고 난 뒤 남은 가족들을 위해 부양금을 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제도가 있다. 즉 딸을 죽인 놈을 사형시키기 위해 오히려 그놈에게 거액의 돈을 줘야 한다는 점이다. 피의자 역시 딸의 친구 오빠라는 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반복해서 그린다. [디아파종]의 또 다른 특징은 대사량이 상당한데 복잡한 상황에서 용서와 복수가 양립되며 주장하는 캐릭터들의 연설에 빠져들게 하고, 죄와 벌 사이 지금의 이란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마을(Our Village) – 우리 고봉수 사단이 달라졌어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 [우리마을]은 [튼튼이의 모험], [델타 보이즈] 등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끈 고봉수 사단의 신작이다. 선한 고수가 마을을 지배하는 악당을 물리치지만, 그가 다시 마을의 독재자가 되자 마을 사람들이 그를 없애기 위해 또 다른 고수를 찾아 전국 팔도를 떠도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봉수 사단 특유의 병맛과 롱테이크,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현실성 제로의 캐릭터, 무엇을 예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스토리 전개 등 팬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특히 그동안 고봉수 사단 영화에는 애드리브가 많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본으로 정극 대사의 맛을 살린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어색함과 오글거림이 예상하지 못한 재미를 준다. 쿠엔티 타란티노의 작품을 보는 듯한 챕터 구성과 강호 고수와 악당의 대결을 그린 무협의 클리셰를 적절히 이용해 고봉수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악당을 물린 친 영웅이 타성에 젖어 다시 악당이 되고,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또 다른 영웅을 찾아야 하는 반복되는 아이러니가 현실의 부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웃음 뒤에 씁쓸한 맛을 전한다.

야구소녀(Baseball Girl) – 감동 꽉 찬 직구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 [야구소녀]는 영화 내외적으로 편견에서 출발한다. 영화 외적으로 “여성이 프로야구선수가 될 수 있나?”, 영화 내적으로 “스포츠 드라마의 전형적인 플롯을 극복할 수 있나”, 결론적으로 [야구소녀]는 이 같은 편견을 담장 뒤로 멋지게 넘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주인공과 적당한 거리를 두되 의미 심장한 대사와 행동을 통해 마음을 움직인다. 확실히 지금까지 본 스포츠 드라마와 다르다. 물론 익숙한 스포츠 드라마의 플롯 (예를 들어 경쾌한 음악으로 고된 훈련 과정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영혼 없는 인간 승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를 향한 진정한 응원을 전달하게 만든다. ‘빠름과 강점’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느림과 약점’의 미학을 통해 영화가 전하는 깨달음은 현실에 벽 앞에서 고민하는 모두에게 던지는 마음 꽉 찬 직구가 될 것이다.

어느 영화감독의 고군분투기(The Gangs, The Oscars, and The Walking Dead) – 대만판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 [어느 감독의 고군분투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씨네필의 마음을 대변한 유쾌한 장르영화다. 멋진 영화를 만들어 오스카에 가는 것이 꿈인 두 청년에게 조폭 보스가 후원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어느 한 컷 대충 쓰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재기 발랄한 연출과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해 재미를 더한다. 초반 30분의 지루함이 지나면 예상과 완전 다른 영화로 다가온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처럼 [어느 감독의 고군분투기]도 전혀 예상을 뒤엎는 반전으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럭키 몬스터(Lucky Monster) – 역대급 럭키가 몬스터를 만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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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커런츠: ★★★ [럭키 몬스터]의 GV 때 프로그래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상한 영화죠?” 아이러니하게도 [럭키 몬스터]는 이런 점이 최대 매력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하는 일은 안되고 사채 빛으로 건달에게 쫓기는 주인공은 예전부터 계속 마음의 소리가 들려 힘들어한다. 그러던 중 마음의 소리가 말하는 숫자로 로또를 사고 1등에 당첨되어 인생 역전을 이루지만, 오히려 역대급 ‘럭키’는 주인공을 더욱 ‘몬스터’로 만들게 한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엉뚱한 연출과 구성, 엇박자 코믹 요소가 즐겁지만 멘탈 붕괴로 점차 미쳐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섬뜩하고 괴기스럽다. 제목처럼 어울릴 수 없는 두 단어의 불협화음이 묘한 멜로디로 탄생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즐길 것일까, 거부할 것인가” 뻔한 화법의 상업영화에 지친 관객에게 대안을 제시한 독립영화마저, 어쩜 익숙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던 중 깜짝 등장한 [럭키 몬스터]는 그것마저 깨부수는 악동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