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부산국제영화제 결산③ (개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 시빌 外)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로 세 번째다. 매번 올 때마다 느끼지만, 어디 가서 ‘영화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부산을 찾은 영화인들의 열기는 뜨거운 것 같다. 영화를 예매하기 위해 밤새 자리를 지켰던 이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올해 부산에서의 2박 3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성공적인 2순위 선택’이다. 애초에 1순위로 고른 작품들이 전부 매진될 것이라 예상했기에(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마음 편하게 고른 작품들의 대부분은 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이었다. 에디터가 부산에서 본 일곱 편의 작품들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해본다.

개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 (Dogs Don’t Wear Pants) – 이래 봬도 힐링 영화랍니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BDSM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와 [헬레이저]가 연상되는 포스터. 언뜻 보면 [개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부산보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어울리는 작품 같기도 하다. 호기심에 덜컥 예매를 해버렸고, 그 결과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영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예상이란 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보단 야하겠지?’ 싶은 마음이었냐고 묻는다면, 말을 아끼겠다.

[개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익사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유하가 우연히 발을 들인 SM 클럽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아내의 죽음 이후 유하는 절망과 비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때때로 찾아오는 성욕마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며 살아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무기력한 삶의 한줄기 빛이었던 딸 엘리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두 사람의 사이마저 소원해지는데, 이때 유하를 해방시켜준 것이 도미니트릭스인 모나가 선사하는 ‘브레스 컨트롤’이다.

유하가 목이 졸리는 행위에 집착한 이유는 성적 쾌락 때문이 아니다. 의식을 잃는 동안 아내의 환영을 볼 수 있기에, 즉 그 시간만큼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점차 강하고 오랜 자극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집착이 심해지면서 유하는 딸과 직장, 나아가 자신을 유일하게 해방시켜주는 모나와도 멀어지게 되지만,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깨달으면서 성장을 이룬다. 결국 [개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 BDSM이라는 소재의 힘을 빌려 상실과 절망에 빠진 인간의 극복기를 그린 블랙 코미디이자 힐링 영화라 할 수 있는 셈인데,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와 주제가 맞물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배우들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도 여운을 더한다. 유하 역의 페카 스트랑은 [톰 오브 핀란드]에 이어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일에서 탈출구를 찾는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크리스타 코소넨 역시 겉으로는 차갑고 강하지만 내면은 여린 모나 역을 완벽히 소화하면서 두 캐릭터 모두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예쁘장한 BDSM’만을 접한 이들이라면 몇몇 장면에서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으니, 조금은 긴장하고 가길.

나의 정체성 (My Identity) –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참 정직한 제목을 가진 작품. [나의 정체성]은 10대 소녀의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을 그린다. 레이는 대만인 어머니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택한다. 우연히 만난 아오이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저녁, 아오이를 구하기 위해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인적 드문 마을로 도망친 두 사람은 주인 없는 여관에 머물며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인 프로듀서 문혜선과 일본인 감독 스즈키 사에가 그린 ‘혼혈 소녀’의 성장은 담담하게 흘러가지만,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극중 결말을 포함해 현실인지 환상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 순간들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라고 하니,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이 될 수도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시빌 (Sibyl) – 사랑과 배신,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한 프랑스식 코미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것보다, 아델 엑사르쇼폴로스가 출연했다는 사실에 망설임 없이 예매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심리치료사를 그만둔 시빌이 마지막 클라이언트인 영화배우 마고의 삶에 개입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그린다. [시빌]은 누가 봐도 지극히 프랑스 코미디스럽다. 불륜과 외도, 배신이 난무하지만, 이를 정말 유쾌하게 풀어낸다. 시빌이 마고를 돕기 위해 촬영장을 찾아간 이후 스크린 밖의 복잡한 인물 관계가 영화(‘시빌’) 속 영화 촬영에 영향을 주는 코미디가 인상적이다. 과거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새로운 욕망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시빌을 연기한 비르지니 에피라 뿐만 아니라 산드라 휠러, 아델 엑사르쇼폴로스, 그리고 가스파르 울리엘의 퍼포먼스가 영화를 ‘하드 캐리’했다.

69세 (An Old Lady) – 버텨주셔서,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주연 배우들 바로 옆에서 영화를 본 것 말고도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작품. [69세]는 69세의 효정이 병원에서 남자 간호조무사 중호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시작한다. 효정은 연인 동인과 함께 경찰에 신고하지만, 중호는 성폭행이 아닌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한다(이 모습이 너무 뻔뻔해서 괜히 옆자리에 앉은 김준경 배우를 여러 차례 째려봤다). 이후 영화는 성폭행의 피해자인 효정이 상처와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69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쾌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러나 [69세]의 결말이 의미 있고,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효정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숨기지 않고 본인이 쓴 글로 피해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적 약자’라 칭하는 노인과 여성에 대한 클리셰에 맞서고, 영화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와 달라’가 아닌 ‘누구나 겪을 수 있어’ 같아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예수정 배우와 기주봉 배우의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연기가 영화에 힘을 더했다.

봄봄 (A Road to Spring) – 초중반은 ‘리얼리즘’, 결말은 ‘작위적’이라는 아이러니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한 가장의 몸부림. 경제 불황으로 공장 일자리를 잃게 된 따촨이 도둑 누명까지 쓰게 된다. 결백을 주장하며 직접 범인 검거에 나선 주인공의 여정에는 유머도 섞여있지만, 중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실업이나 빈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현실적이라 마음 놓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결말까지 굉장히 흥미롭게 봤으나, ‘이 지역은 한 때 빈곤 문제가 심각했지만 이제는 성장해서 괜찮답니다~’라며 마무리 짓는 자막이 어딘가 모르게 작위적으로 느껴져 괜스레 씁쓸했다.

이 세상에 없는 (Not in This World)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_파노라마: ★★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작품. 연인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무명 가수 지수가 세상을 원망하며 가출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범죄 조직에 가담하고, 지수의 유일한 팬이었던 정철은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내용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감하기 힘든 캐릭터와 어색한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졸지 않았음에도 ‘내가 놓친 부분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가이드북과 각종 영화 정보 사이트에 120분이라 적힌 러닝타임도 알고 보니 165분이었고(부국제 공식 홈페이지에만 이렇게 적혀있다), 성폭행과 성매매라는 소재도 그렇고, 몇 분이나 지속되었던 성기 노출은 도무지 15세 관람가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대에 너무 앞선 실험적인 작품이기에 ‘이 세상에 없던’ 것이었을지도.

좀비 차일드 (Zombie Child) – 여기 좀비는 졸음을 이기진 못하더라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 평범한(?) 좀비물을 기대하지 마시라. 1970년대 아이티에서 부두교 주술에 걸린 남성이 좀비가 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오늘 날을 살아가는 아이티 출신의 소녀가 이 남성에 대한 환영을 접하게 된다는 내용. 미안한 말이지만 중간부터 정말 푹 자버렸다는 말 말고는 이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좀비 차일드]를 본 많은 관객들도 비슷한 감상평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