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드러머 걸’ 매혹적인 첩보 스릴러

 

이미지: (주)왓챠

2013년 영화 [스토커]로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던 박찬욱 감독이 이번에는 BBC 6부작 시리즈에 도전했다. 첩보 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존 르 카레가 1983년에 발표한 『리틀 드러머 걸』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소재로 한 [리틀 드러머 걸]은 무명의 젊은 여성 배우가 모사드가 주도하는 놀랍도록 잘 짜인 각본에 빠져들어 폭탄 테러를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조직에 침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떠오르는 신예 플로렌스 퓨가 순진하면서도 대담하고 도전적인 주인공 ‘찰리’ 역을 맡아 스파이의 세계로 유혹하는 비밀 요원 ‘가디’로 분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위험한 역할을 제안하는 모사드 요원 ‘마틴’을 연기한 마이클 섀넌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박찬욱 감독의 인장이 새겨진 황홀한 미장센으로 가득한 [리틀 드러머 걸]의 강점은 남성 전유물로 여겨왔던 첩보 스릴러의 세계를 비틀었다는 점이다. 최근 두 번째 시즌을 시작한 [킬링 이브]처럼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복잡하고 불가해한 스파이의 세계로 걸어들어간다. 주인공 찰리는 우리에겐 다소 멀게 느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녹아든 서사의 안내자 역할로 탁월한 배경을 갖고 있다. 바로 찰리의 직업이다. 가상의 인물을 관객에게 설득하고 감정적인 몰입을 이끄는 배우의 직업적 특성은 지리학적으로 복잡한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1차 관문이 된다. 찰리는 비록 큰 무대에 서는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수준급의 연기 실력과 더불어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이 자리한다. 문제적인 모사드 요원 마틴은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찰리의 욕망을 꿰뚫고 거대한 판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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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된 대사간 관저가 폭발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찰리가 발 들이는 비정한 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폭탄 가방을 두고 떠나는 젊은 여성과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공놀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 집에서 나온 후에야 비극을 예감한 남자의 표정과 겹쳐 폭발의 강도는 더욱 무시무시하다. 찰리는 증오와 폭력, 무고한 희생의 악순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위태로운 세계에 빠져든다.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우울한 눈빛으로 찰리를 매료시키는 가디는 이 위험천만한 작전을 현실화하는데 첫 번째 공을 세우는 인물이다. 비밀 요원이라는 신분에 맞게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며 찰리에게 혼란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뜨겁고 열정적인 찰리는 알 수 없는 남자 가디의 매력과 순진한 이상에 빠져 위험한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 세계의 스파이 역할은 점차 차갑고 비정한 민낯을 드러내며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찰리는 철저히 목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폭력이 낳은 악순환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된다.

 

[리틀 드러머 걸]은 현재도 계속되는 비극을 환기하면서 스파이가 된 배우라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점차 경계가 모호해지고 딜레마에 봉착하는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인물들은 저마다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있다. 작전을 위해 가디와 가상의 연인으로 호흡을 맞추는 찰리는 역할에 빠져들수록 감정도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그뿐인가. 제안을 수락하고 나서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데다 점차 모순적인 현실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찰리를 위험한 세계로 이끈 가디도 마찬가지다. 찰리가 적진에 근접해질수록 비밀 요원이라는 신분보다 본능이 앞선다. 찰리와 가디는 역할과 욕망,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에서 치열한 갈등을 겪는다. 반면 이 모든 걸 주도한 마틴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거침없이 내달린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오가며 가상의 역할극을 창조하고 인간성은 쉽게 짓밟는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듯한 마틴은 어떤 면에서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보다 더 위험하고 야만적이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매혹적이지만 선뜻 다가서기 난해하고 느린 서사에 끝까지 몰입하는 원동력이 된다. 익히 여러 작품에서 범상치 않는 연기력을 실감해왔지만, 플로렌스 퓨는 시청자들도 찰리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동화될 수 있게 환상적인 연기로 극을 주도한다. 상처 입고 실망하고 분노하는 격렬한 감정 변화를 탁월하게 소화하며 앞으로 배우로서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차기작으로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 그레타 거윅의 [리틀 위민]이 있고, 최근에는 [블랙 위도우]에 합류했다.) 마이클 섀넌은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야만적인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다. 쇳소리에 가깝게 낮게 깔린 음성과 위협적인 말투는 냉철하고 야비한 인물을 더욱 공고히 한다. [리틀 드러머 걸]의 마틴은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트릭랜드보다 더욱 지독해 보인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디를 연기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앞서 두 배우처럼 강렬한 잔상을 덜해도 우울과 우수에 찬 눈빛만으로 서사적으로 결여된듯한 인물의 아쉬움을 해소한다. (찰리와 가디의 관계는 서사보다 이미지로 강조되어 급진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틀 드러머 걸]은 전반적으로 서사보다 이미지가 앞서며, 비약적으로 흘러간다. 제대로 채 전달되지 못한 찰리와 가디의 관계처럼 복잡한 상황 속에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모호한 감정을 품고 가상의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찰리의 여정은 보여주는 것보다 생략된 게 더 많아 보인다. 불친절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매혹적이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세련된 미장센은 단순히 기교적인 화려함과 세련됨에 그치지 않고 응축적인 서사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드리운다. 어쩌면 미학적인 아름다움 덕분에 비현실적인 작전에 혼재된 로맨스가 나름의 설득력을 갖고 냉정한 현실에 희망적인 여운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