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끔찍한 실화를 엄숙하게 재구성하다

날짜: 6월 23, 2019 에디터: 혜란

요즘 전 세계적으로 화제인 작품은 단연 [체르노빌]이다.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극화한 5부작 미니시리즈로 미국 HBO와 영국 Sky가 공동 제작했다. 생방송과 디지털 플랫폼으로 약 8백만 명이 시청했고, 평점 9.4점으로 쟁쟁한 작품들을 물리치고 TV 시리즈 IMDB 평점 1등을 차지했다. [왕좌의 게임]처럼 오랜 기간 동안 많은 팬을 양산한 히트작이나 [빅 리틀 라이즈]처럼 할리우드 톱스타가 출연한 작품도 아니지만, [체르노빌]은 입소문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비평가와 시청자 양쪽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벌써부터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이 드라마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은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바로 ‘정확성’과 ‘진정성’이다.

철저한 조사

이미지: HBO

[체르노빌]의 크리에이터, 크레이그 마진은 각본 집필 전 약 2년 반 동안 광범위하게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0대 때 일어난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의 피해가 막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경위나 피해 규모는 몰랐다. 관심이 생긴 후에 과학 저널에 실린 논문, 정부 보고서, 당시 체르노빌 발전소에 근무한 소련 과학자의 책, 체르노빌 사고를 연구한 사학자의 저서, 다큐멘터리와 증언 기록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으며 사건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려 했다. 철저한 조사는 각본에도 그대로 반영했으며, 과학자와 그 지역 출신인 지인에게도 재차 자문을 구했다. 마진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없던 일을 만들어내거나 사실과 다르게 그리는 것을 지양했고, 그 결과 마치 다큐 같은 드라마가 탄생했다. 등장인물 중 핵물리학자 울라나 호뮤크를 제외하면 모두 실존 인물이며, 호뮤크 또한 당시 과학자들의 입장을 대표한다. 물론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만든 부분은 있지만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사람을 그리다

이미지: HBO

[체르노빌]은 여러 사실을 엮어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이상으로 사건을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드라마 안에는 끔찍한 사고뿐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있다. 마진이 ‘사람’에 집중하는 각본을 쓴 데에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영향을 미쳤다. 10여 년에 걸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피해자들을 인터뷰해 정리한 책에는 정부 보고서나 논문엔 없는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이를 이어받는 듯 [체르노빌]은 우리가 재난 앞에서 잊었던 이들에 주목한다.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관들, 목숨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들, 자신의 능력을 다해 방사능 확산을 막으려 한 사람들이 있다. 과학자들은 진실을 알리려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양심 있는 몇몇 관료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체제에 맞서 이들을 최대한 지원한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묘사되는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에 시청자들은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하는 듯 몰입하게 된다.

소통의 방식

이미지: HBO

[체르노빌]은 소련,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배경이지만 영어로 제작됐고, 배우들은 주로 영국 출신이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해도 영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다가, 영어권 배우가 러시아 악센트를 어설프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지역 시청자들을 분노케 할 수 있다.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마진과 감독 요한 렌크는 언어가 아닌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집중한다. 작가는 체르노빌 사고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사람들의 대화 방식뿐 아니라 얼굴 표정과 특유한 감성을 포착했다. 감독은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정이나 행동으로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연출했고, 배우들은 마치 비밀을 품은 듯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얼굴 위에 미묘한 감성을 덧씌우며 연기한다. 이런 노력으로 일궈낸 세밀한 묘사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출신인 시청자들은 “언어는 영어이지만 내 친척들이 꼭 저렇게 말할 것 같다.”라며 박수를 보냈다.

정확함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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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을 재현하는 데는 미술도 큰 힘을 발휘했다. 당시 사용된 차량은 물론 번호판도 군용과 민간용을 철저히 구분해 만들었다. 소방관의 작업복, 아이들의 책가방을 비롯한 헤어스타일, 안경, 옷 등 패션, 가구, 벽지 등 인테리어, 프리피야티 시가지의 사고 전후의 참상도 실재에 가깝게 복원했다. 마진은 미국인으로서 소련 시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멋대로 상상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드라마 제작진은 처음부터 “정확함이 전부다”라는 철학을 공유했다. 그의 목표는 “복원의 정확성에 대해 미국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봤군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고의 재현 또한 과학자들이 “제대로 그렸네요. 잘했어요.”라고 인정할 만큼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각본 집필 때부터 촬영까지 핵 물리학자를 초빙해 자문을 받았다.

침묵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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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은 소리와 음악 면에서도 독특한 시도를 선보인다. 음악감독 힐더르 군나도티에르는 리투아니아의 핵발전소를 직접 방문해 그곳에서 얻은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스코어 중에는 금속 문에 마이크를 대고 녹음한 소리에 바탕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소리를 찾고 활용한 것보다 더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바로 소리를 효과적으로 ‘안 쓰는’ 장면도 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음악은 캐릭터의 심리나 장면의 긴장감을 보충해 주지만, 감정 자체를 증폭하는 데 음악을 쓰는 할리우드 영화음악 공식을 배격한다. 침묵이나 낮고 조용한 스코어를가 자주 쓰인 것에 대해 렌크 감독은 “드라마가 다루는 사건 자체가 희망도 없고 참혹하다. 여기에 또 다른 뭔가를 씌울 필요는 없다.”라고 설명했다.

실화의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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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을 쓰기 전부터 촬영과 후반 작업에 이르기까지, [체르노빌]이 우직하게 밀고 나간 ‘정확성’과 ‘진정성’은 결국 사고가 지금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가볍게 여기진 않는다는 의미다. 체르노빌 사고는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프리피야티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고, 사고는 인근 지역의 암 등 질병이나 기형아 출산의 원인으로 꼽힌다. 물론 영향력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통계 수치나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없던 일이 되거나 피해자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고 당사자 중 생존자도 있으며, 당시 국가적 재난을 겪으며 트라우마를 호소한 사람들도 있다. 드라마는 엄숙한 태도로 사실에 바탕하여 재현함으로써 이들을 존중하고자 한다.

[체르노빌]의 핵심은 핵의 위험성이 아니다. 드라마는 대규모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국가, 기업, 체제 등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거짓말을 일삼고 관료의 자만심을 내세우며, 비판을 억누르려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야기한다. 작업자의 실수로 인한 사고를 거짓말로 방치하다 결국 수많은 시민의 희생으로 막아야 했던 그날을 잊지 말자고 주장한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재난 상황에서 조직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판단이 어렵다면, 물어야 한다. “거짓말의 대가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