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뎐’ 로맨스와 장르적 재미 모두 잡은 한국형 판타지

날짜: 11월 12, 2020 에디터: 원희
이미지: tvN

한국 설화에서 구미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사람의 간을 노리는 요괴로 등장한다. 주로 공포물에서 활약하던 구미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하고 안타까운 드라마부터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구미호라 하면 소복을 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꼬리 아홉 개가 달린 여성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구미호뎐]은 시작부터 완전히 다르다. 신선하게도 조보아가 아니라 이동욱과 김범이 남자 구미호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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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도깨비]에서 저승사자를 연기했던 이동욱은 [구미호뎐]에서 붉은 머리카락에 타오르듯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영물 구미호가 되어 나타난다. 오랫동안 특정 인물을 기다려왔다는 설정과 태연하고 능청스러운 성격 탓에 초반에는 공유가 연기했던 도깨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동욱은 찰떡같은 비주얼로 현세에 녹아든 이연의 모습을 제대로 구현하고, 멜로 눈빛 가득한 연기로 한 사람만을 향한 순애보를 그려내면서 독보적인 구미호 캐릭터를 완성했다.

조보아 역시 괴담 전문 방송 PD 역할에 걸맞게 무서울 것 없는 강심장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냉철하게 사건의 실마리를 분석하고 답을 찾는 모습을 안정적으로 선보인다. 연기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얽히면서 보여주는 이연과 남지아의 매력적인 케미스트리는 시작부터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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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얽힌 풍부한 서사도 눈에 띈다. 특히 이연과 남지아, 이연과 이랑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먼저 이연과 남지아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애틋한 인연으로 맺어졌다. 인간 이아음과 사랑에 빠진 이연은 자신을 노리는 이무기의 계략 때문에 제 손으로 아음을 죽여야 했다. 산신 자리까지 내던지고 600년 동안 세상을 어지럽히는 구전 속 존재들을 처단하면서 아음을 다시 만나기를 꿈꿨던 이연은, 마침내 아음의 환생 남지아와 재회하고 끊어졌던 연정을 이어간다.

이연과 이랑의 관계 역시 애틋하기 그지없다. 이랑은 이연의 배다른 동생이자 인간인 어머니와 구미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다. 이연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애정 어린 손길로 동생 이랑을 돌봤고, 이랑 역시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주는 이연을 누구보다도 잘 따랐다. 그러나 이랑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렸던 이연의 선택 때문에 이랑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여겼다. 이연은 언제나 동생을 생각했으나 이랑의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형을 증오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가 자신을 다시 돌아봐 주었으면 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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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한국의 다양한 설화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없을 때 몰래 맛있는 밥상을 차려둔다는 우렁각시는 한식당 ‘우렁각시’의 주인이 되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다양한 정보를 판매하는 역할을 한다. 죽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인 삼도천은 내세 출입국 사무소로 현대화되어 전산 시스템으로 망자들을 관리한다. 이처럼 전래동화나 구전 설화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하고 정겨운 인물과 소재들이 현대 사회에 녹아든 모습을 잘 담아내 환상적이면서도 묘한 현실감을 준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요괴를 꼽으라면 역시 ‘어둑시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는 요괴 어둑시니가 [구미호뎐]에서는 녹즙 아줌마로 등장해 이연과 이랑, 지아의 공포심을 붙들고 흔들어놓는다. 나쁜 요괴들도 존재하는 만큼, 적재적소에서 음산한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연출하면서 요괴 판타지의 장르적인 재미를 전한다.

구미호뎐]은 두 주인공의 가슴 두근거리는 로맨스는 물론,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설화 속 요괴들을 다루면서 판타지의 매력을 확실하게 잡았다. 특히 일반적인 퓨전 사극과는 다르게, 조선과 현대가 어우러져 한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 이종족이 등장하는 [전우치], [도깨비] 같은 작품을 기다려왔던 장르물 팬으로서는 쾌감마저 느껴진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