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역시 재즈, 영화 속 재즈 찾아 듣기

 

by. 빈상자

 

가을 속 깊숙이 들어왔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 가을은 무얼 해도 좋다.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야외 공연을 찾아 음악에 흠뻑 취하기 좋고,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책을 벗 삼아 무작정 걷기도 좋다. 이 모든 가을의 낭만을 함께 할 수 있는 연애 중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혹은 이제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는 이별 후에라도 가을은 특별한 계절이다.

그중에서도 가을은 재즈 듣기 참 좋은 계절이다. 재즈를 듣고 있으면 왠지 가을을 더 가을처럼 느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재즈를 잘 모르는 ‘재알못’이라고 해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미는 가을이 되면, 몇 세대를 거쳐 수 십 년 동안 사랑받은 아티스트의 연주와 노래로 채워진 재즈 스탠더드 곡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런 곡들은 영화에서 들으면 더욱 각별하다. 그래서 (재즈 영화만 빼고) 영화 속에서 기억나는 재즈 스탠더드 명곡을 찾아보았다. 이 가을에.

 

 

It Had to be You,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

 

<이미지: 콜롬비아 픽쳐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로코의 대표작이자 ‘가을’하면 떠오르는 영화다. 많은 사람들의 로망으로 자리 잡고 있는 뉴욕의 가을을 배경으로 남사친과 여사친의 아슬아슬한 썸 타기가 이어진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훈남 재즈 아티스트 해릭 코닉 주니어가 영화 OST 앨범 작업에 참여해 ‘It Had to be You’,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 ‘Don’t Get Around Much Anymore’ 등 여러 재즈 음악으로 뉴욕의 가을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었다. 그중 ‘It Had to be You’가 주제곡이라는 사실을 해리와 샐리도 알았다면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처음부터 ‘답은 너였어.’

 

 

New York, New York <셰임> 2011

 

<이미지: 백두대간>

 

‘뉴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재즈 중 하나인 ‘New York, New York’은 가장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의 버전이 말해주듯 보통은 빅밴드와 함께 신명 나게 연주되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로만 적합해 보이던 이 곡을 뉴욕의 가을 감성으로 들려주는 영화가 있다. 뉴욕의 돈 많은 여피이자 섹스 중독자인 브랜든(마이클 패스벤더)의 동생 씨씨(캐리 멀리건)가 그 주인공이다. 건조한 인간관계의 삶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여동생만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브랜든. 뉴욕 재즈바에서 ‘New York, New York’을 느리고 간결하게 부르는 씨씨를 바라보는 모습만큼은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따뜻한 감성과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며 드러난다.

 

 

Autumn Leaves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2011

 

<이미지: 싸이더스>

 

가을이 연애하기 좋은 계절일지는 몰라도,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기엔 세상 구슬픈 계절이 따로 없다. 콜린(에디 레드메인)은 영화 촬영 차 영국에 방문한 마릴린 먼로(미셀 윌리엄스)와 꿈같은 일주일을 보내게 된다. 초가을,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숲 속 강변에서 둘의 감정은 극에 다다르지만 세계적 대배우 먼로와 평범한 영화 스태프인 콜린 사이의 벽은 높았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고, 사랑에 빠지자마자 이별해야 하는 두 사람을 배경으로 흐르는 냇 킹 콜의 ‘Autumn Leaves’에는 그렇게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을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담겨있다.

 

 

My Funny Valentine, <리플리> 1999

 

<이미지: 태원엔터테인먼트>

 

디키(주드 로)처럼 상류층 삶을 살고 싶은 리플리(맷 데이먼). 디키와 함께 고급진 재즈를 뽑아내며 화음을 이루고 있으려니 이제는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변할 수 없고 비극은 점점 가까워진다. ‘My Funny Valentine’을 부르는 리플리의 목소리가 더 쓸쓸하게 들리는 것은 그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깔끔한 외모의 맷 데이먼이 부드럽게 읊조리듯 부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 모두 기억하는 ‘My Funny Valentine’을 만든 쳇 베이커를 떠올리게 한다.

 

 

Quizás, Quizás, Quizás <화양연화> 2000

 

<이미지: 굿타임엔터테인먼트>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의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이 마이클 갈라쏘가 완성한 첼로, 바이올린, 기타 등의 현악기 음악들로 잘 표현이 됐다면, 여기에 냇 킹 콜의 재즈는 둘의 아름다운 감정을 풍성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냇 킹 콜의 음악은 라틴 재즈를 원어인 스페인어로 그대로 부른 곡들이 포함되어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극 중 시대 배경과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장 기억에 남는 ‘Quizás, Quizás, Quizás’와 같은 곡은 원래는 쿠바 작곡가의 곡이 미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는 재즈 스탠더드가 된 경우다. ‘Perhaps, Perhaps, Perhaps’라는 영어 버전도 있지만 역시 원어로 듣는 맛을 이길 수는 없다.

 

 

Angel Eyes,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1997

 

<이미지: United Artists>

 

재즈 음악가인 마이크 피기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재즈를 인상 깊게 활용한다. 특히 니콜라스 케이지의 열연과 감독의 연출이 절정을 이룬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영화 속 재즈 음악 중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일 것이다.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극장 개봉용 영화에는 쓰이지 않던 슈퍼 16mm 포맷의 거친 화면으로, 인생 끝에서 만난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세라(엘리자베스 슈)의 애달픈 만남을 담아냈다. 이 영화가 특별한 것은 ‘Angel Eyes’와 ‘My One and Only Love’와 같은 재즈 스탠더드 3곡을 스팅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스베가스에서 듣는 스팅의 재즈는 뉴욕의 블루노트에서 듣는 재즈처럼 깊은 맛은 없는지 몰라도, 뉴욕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막 기후의 라스베가스의 건조하고 고립된 현대인의 정서가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