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카리스마, 케이트 블란쳇을 빛나게 한 영화

 

by. 유하

 

 

하비 와인스타인 성범죄 폭로 후, 여느 때보다도 여성인권을 고조시키려는 움직임이 뜨겁다. 지난 5월 열린 제71회 칸 영화제에서는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성평등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중심에는 심사위원장을 맡으며, 여성 영화인 82명과 함께 영화계에 만연한 성차별 철폐를 외친 케이트 블란쳇이 있었다. 동시대 활동하는 배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관객들에게는 매번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팔색조 매력의 그녀는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당당히 성평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케이트 블란쳇의 스크린 속 모습이 기다려진다면, 곧 만날 수 있다. 아직까지도 모피 코트와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겨울의 포근함을 몰고 왔던 [캐롤]의 잔향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의 화려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압도할 예정이다. 케이퍼 무비의 전설로 불리는 ‘오션스’ 시리즈의 여성버전 스핀오프 [오션스8]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녀의 새 영화를 보기 전, 그동안 케이트 블란쳇이 걸어온 길을 함께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1. 영국과 결혼한 여왕 – 엘리자베스(1998) & 골든 에이지(2007)

 

이미지: gramercy pictures, 워킹 타이틀

 

50세를 바라보는 지금의 고혹적인 케이트 블란쳇을 떠올리며, 이 영화를 본다면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에 놀랄지도 모른다. 볼타(volta)라는 곡에 맞춰 연인과 함께 춤을 추며 즐거움을 한껏 드러내다가도 자국민을 위해 통일령을 선포하고, 종교 질서를 확립시키고자 언쟁을 마다하지 않고, 수많은 혼담을 거절하며 자신은 영국과 결혼했음을 선포하던 25세의 엘리자베스 1세를, 당시 29세였던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했다.

[엘리자베스]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블란쳇을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블란쳇을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당초 니콜 키드먼이 물망에 올랐던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아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진정한 여왕의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 진출 3년 만에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를 누렸고, 더 나아가 아카데미에도 후보에 오르며 인지도를 얻었다.

9년 뒤인 2007년, 케이트 블란쳇은 [엘리자베스]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골든 에이지]로 돌아와 스페인 무적함대와 전투를 치르는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인 동시에 나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한낱 사람에 불과한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며 또다시 여러 영화제에 후보에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2. 두 번의 오스카 수상 – 에비에이터(2004) & 블루 재스민(2013)

 

이미지: 코리아픽처스, 인벤트 디

 

이후 케이트 블란쳇은 [리플리], [베로니카 게린]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녀가 처음으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쥔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의 [에비에이터]다. 이는 불과 두 번째 노미네이트만의 쾌거였다. 여담으로 블란쳇이 [에비에이터]에서 연기한 하워드 휴즈의 연인, 캐서린 햅번은 실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4번이나 수상한 배우다. 블란쳇은 햅번을 연기하기 위해 테니스와 골프를 비롯한 스포츠는 물론, 햅번 특유의 뉴잉글랜드 상류층 억양을 정확하게 구사하고자 발성 코치 팀 모니치와 함께 매일 연습했다고 한다.

이후 블란쳇에게 다시 아카데미 수상을 안겨준 작품은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이다. 사업가 할(알렉 볼드윈)과 결혼해 뉴욕 상위 1%의 삶을 영위하던 어느 날, 남편의 외도로 모든 것을 잃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에게 신세를 지는 재스민을 연기했다. 블란쳇은 재스민 캐릭터의 기반이 된 월스트리트 희대의 사기꾼 버나드 마도프의 아내, 루쓰 마도프의 인터뷰를 연구하며 캐릭터에 몰두했다. 그 결과, 블란쳇은 재스민의 무너져버린 인생을 탁월한 연기로 보여주며 여우조연상에 이어 여우주연상까지도 거머쥐게 되었다.

 

 

 

3. 토드 헤인즈와의 만남 – 아임 낫 데어(2007) & 캐롤(2015)

 

이미지: 스폰지, CGV 아트하우스

 

“어떤 이는 당신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놓는다”라는 [캐롤]의 슬로건은 사랑이란 단어를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찰나의 순간 시작된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온전히 말한다. [캐롤]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바라보던 1950년대 미국,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만나게 된 테레즈(루니 마라)와 캐롤(케이트 블란쳇)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며, 단숨에 케이트 블란쳇의 대표 작품으로 떠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인연은 가수 밥 딜런의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로 시작되었다. 블란쳇이 풍기는 분위기와 밥 딜런의 초창기 시절 모습을 유사하게 본 감독이 역을 제안한 것이다. 긴 설득 끝에 뮤지션 쥬드 퀸으로서 ‘그’의 분신이 되어 밥 딜런을 연기했다. 공교롭게도 [아임 낫 데어]는 [골든 에이지]와 시기가 맞물리는데, 두 작품 모두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과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다. 블란쳇은 두 작품으로 한 해 아카데미 두 개 부문에 동시에 노미네이트 된 배우가 되었다.

 

 

 

4. 강렬한 악역 –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2008) & 신데렐라(2015) & 토르: 라그나로크(2017)

 

이미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CJ 엔터테인먼트

 

2017년, [토르: 라그나로크]를 통해 드디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첫 여성 메인 빌런이 탄생했다. 케이트 블란쳇은 마블 코믹스 팬인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 오딘(안소니 홉킨스)을 도와 아스가르드의 정복자로 활약했으나 이내 버림받은 죽음의 여신, 헬라 역을 승낙하며 마블에 합류했다. 토르의 강력한 라이벌로 악역을 펼치기 전, 디즈니 실사 영화 [신데렐라]에서 계모로도 열연한 바 있다. 블란쳇은 신데렐라를 구박하기만 하던 기존 캐릭터에 신데렐라 아버지의 사랑을 바랐던 그녀만의 입체적인 사연을 불어넣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계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케이트 블란쳇이 첫 악역을 시도한 작품은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광팬이었던 블란쳇은 19년 만에 돌아온 ‘인디아나 존스’ 4편에서 막강한 힘을 얻기 위해 크리스탈 해골을 찾아 나선 소련 특수부대 리더 이리나 스팔코를 맡았다.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당으로, 그녀는 추격전 도중 흔들리는 차 위에서 중심을 잡은 채 검을 겨루는 등 숨 막히는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5. 오션스 8와 이후 개봉 예정작

 

이미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유니버설 스튜디오

 

무려 1천5백억 원의 목걸이를 노리는 팀이 있다면? 그것도 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적은 7명의 일원으로 말이다. 개봉 전부터 캐스팅만으로도 환호를 불러일으킨 [오션스8]이 6월 13일 국내 관객과 만난다. 케이트 블란쳇은 5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난 데비 오션(산드라 블록)과 함께 각 불법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미국 최대 패션 행사인 메트 갈라에 참석하는 톱스타 다프네(앤 해서웨이)의 다이아몬드를 훔치고자 판을 벌이는 지휘자 루로 활약할 예정이다.

[오션스8] 이후로도 2018년 하반기 케이트 블란쳇이 참여한 영화는 다채롭기만 하다. 마법사 삼촌과 함께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진 시계를 찾아 나서는 고아 루이스의 이야기를 다룬 호러 판타지 영화 [더 하우스 위드 어 클락 인 잇츠 월스]가 9월 21일 북미 개봉을 앞두고 있다. 블란쳇은 일라이 로스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서 삼촌 조나단(잭 블랙)의 이웃이자 절친 마법사 짐머맨 부인을 연기한다.

또한 10월 19일(북미 기준)에는 2012년도 코미디 원작 소설을 기반에 둔 [Where’d you go, Bernadette]과 원작보다 어두운 분위기로 각색되었다 알려진 [모글리], 총 두 편의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다. 특히 그녀는 [모글리]에서 비단뱀 카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는데, 이는 [벼랑 위의 포뇨(북미판)], [드래곤 길들이기 2] 이후 그녀의 3번째 더빙 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