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역사를 새로 쓴 ‘다크 나이트’에 영향을 받은 영화

 

by. 예하

 

 

이미지: ㈜해리슨앤컴퍼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다크 나이트]의 상영관을 빠져나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영화의 힘과 무게에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았던 걸음을 기억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 배트맨 프랜차이즈는 할리우드 히어로물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둡고, 무겁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어려운, 오히려 그래서 더욱 뛰어난 새로운 세대의 블록버스터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다크 나이트]의 뒤를 쫓은 영화들은 수도 없다. 그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차용하거나,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지닌 이야기와 성격에 집중하거나, 우리가 영원히 잊지 못할 빛나는 악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다크 나이트]는 굳건히 명예의 전당을 지키고 있으며, 크리스토퍼 놀란은 완성도나 평가를 떠나 가장 큰 자본으로 인간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는 감독이 되었다. 단 한 편의 영화, 단 한 명의 감독이 바꿔놓은 새로운 세기의 대중영화를 살펴본다.

 

 

피 섞인 직계가족 – 맨 오브 스틸 &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공식적으로 DC 코믹스의 영화판 가상세계와 관련이 없다. DC 확장 유니버스(DC Extended Universe, DCEU)는 2015년에야 등장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우주의 빅뱅을 일으킨 두 영화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다크 나이트]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슈퍼맨 실사영화 [맨 오브 스틸]은 DCEU라는 명칭이 나오기도 전에 이 세계관의 첫 작품으로 등장했다. 티저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부터 [다크 나이트]의 어두운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 영화의 기획과 제작, 각본을 맡았기 때문이다. [300]의 감독이자 DCEU의 포문을 열어젖힌 잭 스나이더의 첫 DC 영화였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놀란의 이름이 새겨진 것 같았다. 마치 DC의 새로운 우주는 [다크 나이트]의 길을 따르리라는 선언처럼 말이다.

 

 

이미지: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리고 3년 뒤, 마침내 배트맨이 돌아왔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공개된 것이다. 비록 같은 세계관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강화 슈트를 입고 자경 활동을 이어온 브루스 웨인의 모습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배트맨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놀란이 빠진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오히려 더욱 어두운 브루스 웨인이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잭 스나이더가 만들어낸 이 상처투성이 어둠의 기사가 다음으로 향할 곳은 어디일까.

 

 

가장 매혹적인 악역 – 007 스카이폴

 

이미지: ㈜해리슨앤컴퍼니

 

관객들에게도,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에게도, [다크 나이트]의 주연보다 더 큰 인상을 남긴 캐릭터가 있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이견의 여지없는 최고의 악역이었다. 찢어진 입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악’ 자체를 현현한 것 같은 그의 모습은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보는 영화보다 일찍 도착했다. 히스 레저가 [다크 나이트]의 개봉을 석 달 남짓 앞두고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역사에 다시없을 그의 조커는 결국 2009년, 오스카 역사상 두 번째로 사후 수상을 했다.

 

 

이미지: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한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 이 시대 악당계의 장인을 담당하고 있는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은 [007 스카이폴]의 악역, 라울 실바는 여러 면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연상시킨다. 적의 심리를 이용하는 히스테릭한 캐릭터가 칠판 위의 손톱처럼 신경을 긁는다. 비슷한 건 악역만이 아니다. 브루스 웨인과 제임스 본드,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과묵한 남자들이 평생 묻어온 정신적 상처와 공포가 두 영화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감독들의 히어로 놀란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가장 먼저 사랑을 고백한 건 여하간 질러버리는 감독, 매튜 본이었다. [킥 애스]로 히어로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그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를 통해 처음으로 대형 프랜차이즈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가 목표하는 과녁의 정중앙에 크리스토퍼 놀란이 있었다. 그는 [다크 나이트]보다 3년 앞서 공개된 [배트맨 비긴즈]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첫 번째 배트맨 영화이자, 해당 시리즈의 분위기를 조성한 가장 큰 공신이다. “[배트맨 비긴즈]가 배트맨 영화에 끼진 영향,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이 영화가) [배트맨 비긴즈] 만큼 좋을 거라는 건 아니지만, 그 태도를 닮을 것이다.” 그의 말 덕분일까, 2011년 공개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적지 않은 캐릭터마다의 성격과 이야기를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여기에 이어 크리스토퍼 놀란과 [다크 나이트]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숨길 생각이 없는 감독이 또 한 명 있다. 2015년, 제임스 카메론의 전설적인 시리즈 [터미네이터]를 리부트한 감독 앨런 테일러 역시 놀란이 배트맨에서 한 일을 터미네이터 프랜차이즈에서 이루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생각하는 놀란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소재를 존경해 마지않지만, 여기서부턴 내가 맡겠다.’” 팬다운 쿨한 묘사다.

 

 

길은 같았지만 수익은 달랐다 – 로보캅 & 파워레인져스: 더 비기닝

 

이미지: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수작이야 수두룩하지만, [다크 나이트]를 보고 힘을 낸 것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처참한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가 유독 많은 건 슬픈 일이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는 진지한 분위기를 좇기 때문일까. 2014년 [로보캅] 리부트가 그랬다. 원작과 달리 장기가 남아있는 ‘살아있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어 가족의 이야기와 인간의 범주에 대한 고민이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영화의 분위기가 자연히 무거워진 이유다. 그 때문인지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처참한 관객수를 기록했는데, 좀 이상하지만 중국에서 압도적인 흥행을 거두어 겨우 본전을 찾았다.

 

 

이미지: ㈜NEW

 

[파워레인져스: 더 비기닝] 역시 영웅의 배경에 더욱 집중하는 영화다. 파워레인져를 이루는 5명의 고등학생들은 모두 다른 인종이고, 캐릭터가 직접 성소수자임을 언급하는 등 개별 캐릭터의 설정이 굉장히 섬세하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의 접근을 닮은 몇몇 히어로물과 마찬가지로 액션 장면이 적고 기대에 못 미친다는 관객들의 불평이 문제였다. 반면 그 성장 서사를 퍽 훌륭하게 그려내 파워레인져의 액션을 보러 들어갔다 훌륭한 드라마를 칭찬하며 극장을 나섰다는 관객도 드물지 않았다. 그 관객들의 수가 매우 적었다는 점이 문제인데, 흥행 수익은 제작비보다 고작 4천여 불 높은 수준으로 손익분기점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