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소재를 낭비한 실망스러운 영화

 

by. Tomato92

 

 

할리우드에서 한 해 쏟아지는 영화가 셀 수 없이 많을 만큼 소재도 정말 무궁무진하다. 관객들은 영화 개봉 전 예고편, 줄거리, 홍보 이미지 등으로 개괄적인 정보를 파악해 그중 정말 참신한 소재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을 하나둘씩 머리에 새긴다. 하지만 기본 3부작 이상으로 구성된 프랜차이즈 영화의 평가가 작품마다 다르듯이 주어진 소재를 요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작품의 퀄리티를 크게 좌지우지한다. 정말 흔한 소재에도 세심한 연출, 탄탄한 서사를 만나 훌륭한 영화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참신한 소재임에도 조악한 CG, 무리수, 캐릭터 설정 오류 등으로 평범 이하의 영화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한다.

 

 

 

1. 인 타임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25살의 나이가 되면 더 이상 늙지 않고 1년의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받아 모든 생활을 시간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신박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가타카]의 연출과 각색을 맡은 앤드류 니콜이 메가폰을 잡아 개봉 전부터 많은 SF 팬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물은 실망스러웠다.

일단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재와 관련된 내용이 매우 조악했다. 인간이 돈 대신 시간을 사용하게 된 이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장면 사이의 이음새가 칼로 자른 듯 자연스럽지 않다. 또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인물들의 액션 시퀀스와 갑작스레 로빈 후드 스타일로 빠지는 주인공의 사랑놀음에 관객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가까운 미래의 서늘하고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노련한 카메라워킹으로 유려히 잡아낸 로저 디킨스의 능력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부족하다. 정말 안타까운 건 이 좋은 소재를 니콜 감독 혼자 독차지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분업하거나 일임했으면 훨씬 더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란 점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 영화 혹은 드라마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2. 루시

 

이미지: UPI 코리아

 

브래들리 쿠퍼의 [리미트리스]와 비슷한 결을 보이는 이 작품은 마약으로 인간의 뇌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루시’ 역에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됐고, 모건 프리먼, 한국의 베테랑 배우 최민식 등이 함께 출연해 화제가 됐다.

극중 루시가 보여주는 초인적인 능력을 화려한 액션으로 담아 팝콘 무비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감독이 구현하려는 세계관 안에 종교, 철학, 인간 본질에 대한 사색이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여 많은 이들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여기에는 어딘가 많이 부족한 CG 처리가 한몫했다. 특히나 다수의 사람을 혼자 상대하는 루시의 액션으로 몰아치다가 후반부에 안 그래도 어려운 양자이론과 관련된 정보를 주입식으로 내뱉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듣기 싫은 강의에 억지로 끌려온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최민식의 등장으로 한껏 기대했을 한국 관객 중에는 생각보다 인상적이지 않은 그의 캐릭터와 다른 한국인 캐릭터의 어설픈 연기에 조금 실망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90분의 러닝타임에서 철학적 메시지와 재미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던 감독의 욕심이 결국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와 별개로 박스오피스에서는 매우 훌륭한 성과를 내어 후속편이 나온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됐고, 뤽 베송 감독의 스캔들로 더욱 불투명해진 상태다.

 

 

3. 해프닝

 

이미지: 이십세기폭스코리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어느새 좋은 소재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영화감독의 표본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후 ’23 아이덴티티’로 추락했던 명성을 다시 회복했다) [해프닝]이 개봉했을 당시에는 전작 [레이디 인 더 워터]의 흥행 실패로 ‘한때 잘 나가던 영화감독’이라는 조롱을 당하며 상황이 정말 좋지 않을 때였다. 때문에 샤말란에게는 이 영화가 재기를 위한 정말 중요한 작품이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제작사를 웃음 짓게 했지만 빈약한 내용으로 정작 본인은 엄청난 뭇매를 맞았다.

영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이은 자살 사건이 벌어지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이 생존을 위해 도망치는 과정을 그린다. 공포감을 조성하는 오프닝의 스산한 음악과 느닷없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시체 장면은 ‘볼만한 영화가 나왔구나’ 하는 내적 기대를 품게 만들지만, 주연인 마크 월버그와 주이 디샤넬이 함께하는 장면부터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기 시작한다. 분명히 부부라는 설정임에도 생전 처음 만나는 듯한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류와 호흡은 보는 이들을 괴롭게 하고, 각자 서로의 발연기 실력을 뽐내듯 부자연스럽고 영혼 없는 억양의 대사에 헛웃음마저 나온다. 연기가 오죽 형편없었으면 마크 월버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극중 장면이 밈으로 만들어져 돌아다니기도 했다. 분명 ‘이유 모를 연쇄 자살’이라는 엄청난 떡밥을 던졌음에도 서사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몇몇 허술한 힌트만을 제공하며 극을 이끌다 보니 나중에는 초반부와 같은 영화를 보고 있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후 해답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피하고 같은 연출만 답습하다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내용을 부랴부랴 주워 담아 용두사미 꼴의 결말을 맞이한다. 감독 나름대로 환경 파괴에 대한 계몽적이고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시도는 높이 사고 싶으나, 그것이 좋은 소재를 망친 것에 대한 방패가 될 수는 없다.

 

 

 

4. 더 퍼지

 

이미지: UPI 코리아

 

1년 중 단 하루, 살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범죄가 허용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의 작품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인시디어스]로 저예산 영화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 [트랜스포머]의 마이클 베이가 제작을 맡았다.

영화에서 에단 호크가 맡은 주인공 캐릭터는 가정용 보안 시스템 장비를 팔아 부를 모은 인물이다. 이 캐릭터 설정부터 이야기의 흥미를 많이 반감시켰는데, ‘퍼지 데이’라는 명목 하에 아수라장이 된 바깥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리는 대신 영화의 주요 사건들이 대부분 주인공의 집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지만 일말의 당위성 없이 연이어 터지는 인물들의 무개념 행동이 극심한 짜증을 유발했고, 시종일관 고구마를 씹는 듯한 답답함을 주는 주인공 아들의 만행이 분노지수의 정점을 찍게 했다. 때문에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한 흥미로운 소재를 어떻게 다룰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 중에서 화병 환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역시나 소재가 좋은 탓인지 3백만 달러라는 저예산의 30배 가까운 수익을 거두었고, 여태까지 총 세 편의 후속 영화가 개봉했으며 TV 시리즈로도 제작되어 현재 북미에서 방영 중이다.

 

 

5. 그곳에선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지: Warner Bros. Pictures

 

신랄한 입담으로 유명한 배우 겸 코미디언 리키 제바이스가 각본, 연출, 주연, 제작을 맡은 판타지 코미디 영화. 소설이나 사기꾼처럼 ‘거짓’의 개념이 없는 세계에서 거짓말을 발명한 남자를 둘러싼 해프닝을 블랙 코미디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동안 속고 속이는 심리전이나 음모, 배신을 다룬 영화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거짓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설정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참신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와 더불어 처음 만난 두 남녀의 적나라한 대화, 위독한 어머니 어머니 옆을 지키는 아들에게 위로 한 마디 없이 사실만을 늘어놓는 의사 등 이런 소재이기에 가능한 장면이나 캐릭터를 만들어 초중반까지 극을 유쾌하게 이끌어 갔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침묵하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속에 있는 말을 전부 꺼내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듯 멍청한 말을 쏟아내는 인물들이 많아지며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또한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코미디보다 로맨스 서사에 치중하며 뒷심이 부족해지는 모습이 여실히 보였고, 종교에 관한 굉장히 민감한 부분까지 건드리며 많은 이들의 빈축을 샀다. 소재는 좋았지만 거짓말에 대한 불분명한 정의와 지나치게 외모지상주의적인 대사들에 ‘거짓말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씁쓸한 결론만 남은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