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결산 – ④에디터W

영화제 기간 동안 어땠냐는 질문에 “그때가 꿈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 그대로, 에디터가 10월 초 서 있던 곳은 정말 현실이 아닌 듯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영화를 위해 모여든 걸 본 것도 그랬고, 전쟁 같았던 현장 예매에 뛰어든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집에서 주중 쌓인 피로를 풀고 있을 시간에 부산에서 태풍을 맞이한 게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 오들오들 떨면서도 영화를 보다니, 항상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던 걸 재고해봐야 할 걸 같다. 몸은 엄청나게 힘들었지만(결국 감기가 왔다) 내게 열정이란 게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총 11편을 봤다. 좋은 영화 아닌 영화 구분할 자리도 깜냥도 되지 않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토대로 소감을 적을 수는 있을 듯하다. 어디까지나 그 당시 에디터의 정신 상태와 취향에 따른 것이라, 오히려 이 분류로 에디터의 취향이 얼마나 편협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확인 가능할지도 모른다.

작가 미상 / 뎀젤 / 무영자 / 시스터스 브라더스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에서 다양한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도 막상 제일 재미있는 걸 꼽아보면 가장 무난한 것들만 떠오른다. 영화제를 가는 것 자체의 피로도가 상당하기 때문에 지적 활동이 필요한 작품보다 한 번에 대부분 소화 가능한 작품들이 더 기억에 남는 듯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무난한 것들이 재미있었다.

[작가 미상]은 러닝타임 188분의 압박을 견딜 만큼 재미있었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쿠르트’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을 보여준다. 한 인간의 형성에 과거의 잘못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영화임에도 쿠르트가 도달한 예술의 경지는 ‘작가의 목소리’가 없는, 말 그대로 ‘극사실주의’라는 게 아이러니랄까. [뎀젤]은 반전의 미학이 돋보이는 영화다.  ‘위험에 빠진 여자’ 서사로 진행되던 영화는 막상 그 ‘여자’, 퍼넬로피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뒤집힌다. “구원을 원하지 않는 여자”는 그녀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만 보는 남자들에게 총을 쏘고, 폭탄조끼를 입히며, 돌을 던지는데 그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미아 바시코브스카의 퍼넬로피는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할 듯하다.

[무영자]는 장예모 무협 영화 특유의 압도적 비주얼과 실체와 그림자를 오가는 등초의 1인 2역이 돋보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있었다. “물 흐르듯” 유연한 무술 동작이나 극 후반에 나오는 철우산 활용 방법(?) 장면은 의도는 진지하고 비장한데 결과물이 예상 밖의 큰 웃음을 선사한다. [시스터스 브라더스]도 영화의 장르적 관습과 캐릭터 간 관계, 코미디 타이밍까지 끊임없이 뒤엎으며 박장대소와 냉소, 감동과 경멸을 오간다. 존 C. 라일리의 연기는 이 전복적인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살린다.


내게 총을 줘 / 붉은 남근 / 세 번째 부인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와 여성이 고통받는 영화는 재미가 있어도 보기 힘들다. 소녀들이 침묵과 고난을 강요당하는 건 볼 때마다 불편함에 몸을 뒤틀게 된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어쩌다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세 편이나 보게 됐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의 처지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게 총을 줘]는 마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면 나올 법한 작품이다. 디스토피아 멕시코를 배경으로 살아남으려는 소녀의 이야기다. 소녀 ‘헉’은 카르텔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소년이 되었지만, 카르텔 간 총싸움으로 피바다가 된 황무지에선 누구도 헉을 구해주지 않는다. 어쩌다 카르텔 보스와 함께 강으로 나간 헉은 친구들의 응원 속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정의 구현을 실현한다.

[붉은 남근]도 평화롭지만 숨 막힐 듯한 부탄의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상계의 삶을 그린다. 동네 광대인 아버지가 부끄러워도, 강간을 당해 고통스러워도 상계는 혼자 괴로워했다. 유일하게 털어놓은 남자친구에게도 ‘헤픈 여자’라 손가락질 받자, 상계는 마침내 폭발한다. 막판의 전복이 잠깐의 놀라움과 카타르시스를 줄지는 몰라도, 그게 상계를 위한 답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세 번째 부인]은 지주 집안의 셋째 부인이 된 소녀 마이가 가부장제의 불합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순하고 조용한 마이는 새 가족과 잘 어울리지만, 집안 ‘마님’으로서 보고 듣는 불의에 침묵하며 여자의 자유와 운명이 오직 남자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 남자의 잘못도 여자의 잘못이 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메이의 선택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 / 레토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에서 영화 정보를 얻을 창구는 다소 한정되어 있고, 그중 가장 신뢰할 만한 건 역시 프로그래머들의 친절한 소개다. 하지만 소개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그리고 글과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는 작품을 만나면 영화를 보는 내내 당황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그렇게 당황한 작품은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이하 야만의 역사)]와 [레토]다.

[야만의 역사]는 전쟁 재현 행사를 준비하는 예술가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성적 논쟁에서 승리해도 대중의 공감 결여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큰 줄기는 이해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철학자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 자체가 상황극이라는 설정을 처음에 알아채지 못했다. 낯선 설정과 가끔 외계어처럼 들리는 논쟁에 정신줄을 잡고 있어야 감상에 무리가 없다.

[레토]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에디터는 이 영화를 빅토르 최의 전기 영화로 알고 있어서,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면서 당황했다. [레토]는 음악 영화이면서도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뮤지컬 영화였고,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건 빅토르, 마이크 등으로 대표되는 80년대 레닌그라드 언더 씬이다. 음악에 열정을 바친 청춘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흑백 영화인데도 장면 하나하나가 총천연색으로 보인다. (엔딩 크레디트엔 컬러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바람의 저편 / 만타 레이

이미지: 부산국제영화제

마지막 2편은 ‘재감상이 반드시 필요한’ 작품이다. 재미있게 봤기 때문은 아니다. 내·외부 요인으로 한 번 감상으로는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꼭 다시 볼 거라 꼭꼭 저장해 뒀다.

[바람의 저편]은 40년 만에 완성된 오손 웰스의 유작이다. 수다스러운 코미디와 심오한 예술영화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마치 영화 2개를 보는 듯했다. 큰 기대를 안고 갔지만, 태풍의 압박으로 녹초가 된 상태로 아침부터 존 휴스턴의 저음을 들으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고 나서 ‘아하!’라는 이해보단 ‘응?’이란 의문이 더욱 많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선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하기 때문에, 넷플릭스로 챙겨보며 의문점을 해결하려 한다.

[만타 레이]는 표면적 내용은 단순해도 영화는 단순하지 않았다. 마음씨 착한 어부와 그가 구한 이름 모를 사내의 이야기인데, 그 평화로운 공간 아래 비명도 못 질러본 사람들의 속삭임을 인공의 빛으로 채워 넣었다. 소리 없이 스러진 사람들이 모인 숲을 채운 반짝이는 원석, 어부와 통차이가 함께 한 공간을 채운 크리스마스 라이트와 디스코볼은 영화가 드러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 전한다. 많은 이야기를 품은 영상을 하나하나 뜯어보려면 재관람에 해설은 필수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