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그들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by. Jacinta

 

 

이미지: 넷플릭스

 

오쇼 라즈니쉬를 잘 모른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 거는 순전히 어디론가 응시하는 공허한 시선이 담긴 포스터가 묘한 흥미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짧은 소개 문구도 자극적인 상상력을 부추겼다. 게다가 짧지도 길지도 않은 6부작이니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에 한 편씩 보면 일주일이면 금세 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한주 동안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Wild Wild Country)]를 보기 시작했다. 제목처럼 예상을 벗어난 문제적인 흥미로움을 느끼면서.

 

“오리건 사막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라! 수많은 이가 숭배하며 헌신했던 영적 지도자의 원대한 프로젝트. 국가적 추문까지 일으킨 그 은밀한 실체를 파헤친다”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 오쇼 라즈니쉬를 중심으로 컬트 집단의 기이한 실체를 파고드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중심은 오쇼 라즈니쉬가 아니었다. 솔직히 오쇼 라즈니쉬를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다큐멘터리의 초반 진행은 흥미롭지만 약간의 당황스러움도 안겼다.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이하 ‘오쇼’)는 인구 백 명도 안 되는 오리건의 작은 마을에, 그것도 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그곳에, 붉은 물결을 이루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마을과 인접한 황량한 토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거대한 신흥 공동체로 변모하면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낯선 이들을 향한 불쾌한 긴장이 형성된다. [오쇼]는 이제 인도의 푸네로 시점을 옮겨, 그들이 어디에서 시작했고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찾아들게 됐는지 비춘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마 아난드 쉴라’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서구의 부유한 지성인을 사로잡은 지도자 오쇼 라즈니쉬가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다. 라즈니쉬가 어떤 사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거기까진 끝내 깊이 있게 알 수 없었다. 물론 종교와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유분방하며 개방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특히 성에 무척 관대한 라즈니쉬의 사상을 언급한다. 마치 거친 뮤직비디오를 보는듯한 역동적인 ‘다이나믹 명상’은 긴 말이 필요 없이도 라즈니쉬가 어떻게 서구의 부유한 젊은 지성인에게 어떤 감동을 줬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 한다. 어쨌든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더 엄청나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미지: 넷플릭스

 

[오쇼]는 오리건에 그들의 원대한 이상과 목표를 담은 공동체를 건설하고 부흥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안팎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담아낸다. 라즈니쉬의 비서이자 공동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마 아난드 쉴라를 중심으로, 역사와 종교, 정치, 권력이 얽힌 여러 문제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지역 주민들과 쉴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대립 관계는 이 작품에서 기본적인 갈등이다. 보수적인 주민들에게 인도인이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가 반가운 이웃이 될 리 없다. 게다가 무척이나 개방적이어서 밤낮으로 낯 뜨거운 장면과 소음이 빈번하다. 평생 작은 마을에서 그들만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형성하며 살아왔던 주민들에게 공동체(라즈니쉬푸람)는 사라졌으면 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강력한 상대가 있으니 바로 17세의 나이에 비서가 되어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던 쉴라다. 그녀는 칩거에 들어간 라즈니쉬를 대신해 언론에 나서고 공동체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그들의 위협이 되는 지역 주민들과 팽팽한 대립 관계를 형성한다. 쉴라의 독단적인 행보는 얼마나 거침이 없는지 미국 내부의 반감과 비호감을 불러온다.

 

[오쇼]는 두 집단의 문제적 갈등 관계를 비추며, 흔히 컬트 집단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 양쪽의 입장을 오가며 어느 한쪽을 두둔하지도 매도하지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보통은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컬트 집단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비호감과 반감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된 데는 타문화를 배척하는 기독교의 보수적인 태도가 근본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문제를 익숙하게 접해왔기에 라즈니쉬푸람이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나 의문도 든다. 물론 주민들의 입장도 이해된다. 그들에게 컬처 쇼크를 안긴 건 부정할 수 없으며,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위험하고 불순해 보인다.

 

[오쇼]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면, 극 중반까지는 그런 의문이 강하게 자리한다. 개인적인 성향 탓인지 왜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와 포용보다 배척의 감정과 논리를 앞세우는지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추방당한 컬트 집단을 옹호하는 시선으로 다루지 않는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로 선회해 사람들이 궁금해할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공동체의 절대 권력을 차지한 쉴라는 외부의 압력을 막아낸다는 집단 이기주의의 미명하에 도덕성의 경계를 넘나든다. 시로 승격된 그들의 합법적인 자치구에 보안 명목으로 총기를 들여오고, 거침없는 언론플레이로 도발하고, 수천 명의 노숙자를 데려오는 등 쉴라는 거리낌이 없다. 그럴수록 내부에서 기반도 굳건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대응 방식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화하면서 잡음이 발생한다. 다시 노숙자들을 내쫓고, 살인을 계획하거나 생화학 테러를 시도하고, 심지어 라즈니쉬를 포함해 공동체 사람들을 몰래 도청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생존을 위해 싸웠던 쉴라는 어느새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처음의 명분과 목적에서 멀어지고 있다. 마침내 라즈니쉬가 긴 침묵을 깨고 쉴라를 공개 비난하고 나서자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흘러간다. 결국 쉴라는 측근들과 함께 독일로 도피하고, 라즈니쉬는 새로운 운영진과 함께 FBI에 수사를 요청한다.

 

라즈니쉬와 쉴라의 격렬한 갈등은 애써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완벽한 기회를 제공한다. 아니 그보다는 [오쇼]를 보면서 궁금했던 라즈니쉬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실체 없는 것이었는지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 비록 비도덕적인 행동을 저지르긴 했지만 오랜 세월을 라즈니쉬와 공동체에 헌신했던 쉴라에게 연민의 감정이 차오른다. 강한 내부의 힘으로 버티던 공동체가 내분으로 쪼개지고 그들의 적대자에게 기회를 안기며 자멸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헛헛한 기분도 든다. 어쩜 그런 기분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무너뜨릴 생각에 기뻐하는 공권력과 주민들의 혐오 넘치는 발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미국은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아닌가. 애초에 그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품지 않았다면,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려던 라즈니쉬의 공동체가 추악한 결말로 치닫게 됐을까. 물론 이는 더 깊게 알지 못하는 개인의 위험하고 편향적인 생각일 수 있다. 또한 쉴라의 공격적인 태도가 화를 자초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오쇼]는 예상과 다른 감정을 남긴다. 미국의 보수적인 작은 마을에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공동체의 흥망성쇠는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나 가치관을 점검하게 하고,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불러오는 파국은 언제나 그렇듯 교훈을 남긴다. 맹목적인 믿음에도 경계심이 바짝 든다.

 

 

이미지: 넷플릭스

 

그 사건 이후 쉴라의 삶은 마지막으로 의외의 놀라움을 안긴다. 쉴라는 그때의 시간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죗값을 치렀다는 말로 대신한다.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노년이 된 그녀는 예전처럼 거세게 밀어붙이진 않아도 말끝에는 기묘한 솔직함이 느껴진다. 할 말을 다하는듯하면서도 핵심은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재주라고 할까. 그래도 그녀가 택한 현재의 삶이 최선인 것 같아 마 아난드 쉴라라는 이름이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