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성애 서사의 아름다움과 진부함

에그테일은 ‘벌쳐’와 리프린트 계약을 맺고, 독자 여러분께 추천할 만한 콘텐츠를 번역합니다

Translated By. Amy & 겨울달
Written By. 캐스린 반애런덩크

 [툴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툴리 Tully
이미지: 리틀빅픽처스

몇 년 사이 모성의 현실에 관한 서사를 다룬 작품이 느리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모성애 서사는 최근의 새로운 문화적 자각에 포함된 부모 서사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데, 작품으로는 드라마 [베러 씽즈], [스밀프], [마더랜드], [렛다운]과 앨리 웡의 스탠드업 코미디 스페셜 [앨리 웡: 성역은 없다], HBO 다큐멘터리 [비잉 세레나], 디아블로 코디가 각본을 쓴 [툴리], 그리고 [제인 더 버진]에 나온 많은 순간이 있다. 모성애의 형태와 정서적 현실을 탐구하는 신간 도서가 출간되는 추세를 더하면, 이전에는 달래듯이 깜빡이는 야간 조명만큼 빛을 못 받던 모성애에 지금은 별안간 우리 삶의 일부를 환하게 비추는데 흥미를 보이는 것 같다. 모성애 서사는 특히 ‘어머니의 날’이 있는 5월에 많이 조명된다. 그러나 올해는 많은 작품이 평범하지 않은 솔직함을 공유했다. 최근 작품들은 모성애를 추켜세우거나 불쾌한 부분을 잘라내거나 인스타그램 필터를 거친 듯 완벽하게 그리는데 관심이 없고, 어머니의 노력과 모성애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모성애 서사의 새로운 경향은 진실성에 관심을 둔다.

새로운 경향을 다룬 훌륭한 글도 많이 발표됐다. 새이디 도일의 『성녀/고통의 양면』이나 사라 블랙우드의 『모성애 서사는 장르화 되는가』, 윌라 페스킨의 『셰일라 헤티의 모성애와 희미한 예술적 괴물의 자아』, 제니퍼 스캐퍼의 ‘셰일라 헤티와 메건 오코넬’에 대한 글, 몰리 피셔의 『다른 시각으로 본 모성애』 등이 있다. 이 글 대부분은 묻는다. 어머니이자 그 자신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모성애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지루한 반복으로 삶이 정의되는 주인공 서사의 함정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동시에 느끼는 평범한 감정과 초현실적인 감정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모성애가 어떤 감정인지 묻는 질문에는 끝없고 불만족스러운 답변이 있다. 하지만 스크린에서 모성의 이야기는 “모성애 서사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묻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같기 때문이다. 장면도 비슷하다. 통제 불능 유모차, 공공장소에서 울부짖는 아기, 웅웅대는 유축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성관계, 결국 차안에서나 차 근처에서 무너져 내리는 엄마를 보여준다. 잔혹한 말을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아이와 굳은 표정의 엄마를 비추는 장면도 익숙하다. 주제도 대동소이하다. 육아 초기 엄마가 잠을 못 자고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은 육체의 부적응이나 집안과 집밖에서 고통스럽거나 반가운 모습으로 변하는 아이, 스스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걱정 등이다. 마치 시체와 목격자 심문의 닳고 닳은 이미지의 반복으로 범죄 서사가 굳어지듯, 이런 장면은 반복되어 나오면서 모성애 서사의 법칙처럼 굳어졌다.

이런 장면이 익숙한 이유는 그 자체가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세계와 닮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에 관한 서사는 있을 법한 이야기에 기대며 기꺼이 받아들인다. 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짜 엄마 이야기’라는 장르에서 나를 미치게 만드는 또 다른 숨은 폐단이다. 완전히 틀에 박혀서 너무나 지루하다. 농담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많은 모성애 서사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보다 다른 형태와 틀로 그 이야기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전율하게 하고 놀라게 만든다.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모성애 서사는 장르가 성숙해지고 비유가 확고해지면서 중요성은 인정받았으나 단순 묘사로 그다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형식적인 실험이나 장르 혼합에 불과해도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적인 충격과 결합한 이야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현실성과 예술적 변형이 결합된 이런 작품들은 논란의 여지는 있어도 모성애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작품들은 변형적이고, 마법 같으며, 소모적인 모성애를 부수기도 하며, 평범하거나 초월적인 경험을 가장 잘 표현한다.

베러 씽즈 Better Things
이미지: FX

파멜라 애들론의 [베러 씽즈]는 줄거리보다 단편적이고 기분에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의 표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성애를 책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공명한다. 패스킨은 이를 두고 분절된 스토리는 없고 짧은 절과 정리 안 된 문단만 있으며 두서없고 경구 같은 이야기라고 묘사한다) 주인공 샘 폭스(애들론)는 노모와 사춘기 세 딸의 끊임없는 요구에 갇혀 있다. 비록 샘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사과하지 않지만, 이를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 그리고 이야기 중에서 어느 정도가 샘의 이야기가 될 것인지는 마치 끊임없이 존재의 의문을 제기하는 샘물처럼 쇼가 제기하는 염려의 근간을 이룬다. 이는 [베러 씽즈]가 전달하는 방식대로 훌륭하게 제기된 질문이다. 드라마의 갈라지고 분리된 이야기들은 실제로 권태로움을 끊임없이 복제하지 않은 채 단조로운 일과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베러 씽즈]의 흩뿌려진 조각들은 샘의 일생의 찰나를 더 효과적으로 대표한다고 느껴지는데, 샘의 삶에서 작은 조각들은 그 순간엔 거대하게 느껴졌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곧이어 새롭고 완전히 다른 감정적 장애물로 대체된다.

[베러 씽즈]의 짧은 에피소드는 [루이]와 톤과 구조가 꽤 닮았는데, (첫 두 시즌에서 루이스 C.K.가 광범위하게 참여한 것을 고려하면 별로 놀랍지 않다), C.K.의 창의적인 시선이 드라마와 많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의심의 여지없이 C.K. 덕분에 만들어진 이야기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애들론이 연기하는 인물의 성격과 적합하기 때문이다. [루이]에서 다양한 이야기, 관찰, 기억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난다. 자기 폄하를 한다 해도 C.K.가 언제나 중심을 맡는다. 그의 존재는 이미 예정된 결론이었다. 애들론의 [베러 씽즈]에선 샘 폭스가 드라마를 정의하는 어머니다운 존재가 되면서 형식 자체가 주제에 대한 비판이 된다. 이야기 조각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언제나 거의 통제를 잃어버리지만 샘은 항상 그곳에 있다. 어떤 이야기도 그녀 없이 흘러가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애들론 자체가 이야기를 잇는 아교이며, 그녀 또한 항상 이야기에 붙어있다.

스크린 속 모성애 서사 전체를 보면,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은 [베러 씽즈]처럼 그 장르를 다른 방식으로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야기를 너무 멀리서 지켜보면 그 넓이와 깊이를 잡아내는데 실패해 마치 이상하고 바보 같은 미니어처처럼 보이게끔 한다. 섀런 호건의 [마더랜드], 사라 쉘러와 앨리슨 벨의 [더 렛다운] 등 양육의 날이 계속해서 불안하게 무뎌지는 것에 기댄 신작 드라마 두 편에 이런 문제가 보인다. 두 편 모두 ‘정확’하긴 하다. [마더랜드]의 첫 에피소드 오프닝에서 한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기 위해 아이 보육 지원을 신청하려는 것 자체는 매우 강렬하며 웃음이 빵 터지지만, 사실 너무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이라 보다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였다. 안나 맥스웰 마틴이 연기하며 정신없이 마구 분출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렬해서 원래 그게 목적인 걸 알고 있는데도 녹초가 된 기분이다. 그게 효과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그 영향에 눈을 못 뜰만큼 힘들다. 내 경험이 특이한 게 아니며, 절박함이 개인적 결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나름의 이점은 있지만 통찰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가장 감동적이고 사려 깊게 그려진 작품은 모두 모성애 서사를 다른 이야기에 품은 것들이다. 그 시각은 모두 다르다. 앨리 웡의 코미디 스페셜은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전달 방식으로 사용해 여성의 몸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명확한 분노를 농담처럼 보이는 말로 잘 포장한다. [제인 더 버진]은 새롭게 엄마가 됐을 때 느끼는 진짜 감정을 과장되고 화려한 텔레노벨라와 엮었다. 세레나 윌리엄스의 임신 후 테니스계 복귀를 다룬 HBO 다큐멘터리 [비잉 세레나]는 가볍고 초점이 흐릿한 접근 방식 안에 명확한 장면 몇 개를 넣는다. 세레나가 급하게 유축기를 벗고 코트에 뛰어나가거나 자신이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다면 혈전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것 등이다. [비잉 세레나]는 만약 세레나의 모성애 서사가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특징 없고 주인공의 칭송 일색인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될 뻔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된 세레나’의 경험담이 반복되고 어찌 보면 뻔했을 법한 이야기에 다른 날카로움이 더해지면서 야망과 정체성에 대한 더 진중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로 선회했다.

툴리 Tully
이미지: 리틀빅픽쳐스

모성애 서사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툴리]는 처음에는 모성애 서사가 다른 이야기와 만난 작품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모성애의 현실이 적나라할 만큼 생생해서 지루하면서도 강렬하고 초현실적이며 분리되고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마저 있다. 겉으로 보면, [툴리]는 가장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모성애를 다루고 있고, 다른 장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결말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하는 마를로는 세 아이 때문에 완전히 지친 어머니로 모성애 장르의 모든 특징은 다 가지고 있다. 그녀의 몸은 망가지고, 차안에서 무너지듯 폭발하며,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갓난아기를 겨우 차안에서 꺼내어 계단을 날아가듯 절박하게 달려간다. 지친 게 눈에 보인다. 테론의 표정만으로 마를로가 그동안 멀리 외로운 행성에 있었고, 아이들에 파묻혀 있었음을 잘 드러난다. 예고편은 그런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이 영화를 보는 게 두려웠다. 그게 진실일지 몰라도 해석도 없고, 지저분하고, 절박한 엄마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 확장하지 않는 작품에 몰입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툴리]의 결말을 미리 말할 것이다. 경고 차원으로 말해두지만,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리 스포일러를 당해서 처음부터 모성애 서사가 다른 장르의 이야기에 들어갔음을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를로의 구세주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는 궁극적으로 출산 후 해리성 증후군이 초래한 환각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툴리]가 동화라는 것이다. 영화는 셀키(인간과 바다표범으로 변신하는 요정)나 인어, 또는 [메리 포핀스]처럼 한 여성이 갑자기 나타나 가족을 바꾸고, 그들의 일이 끝나면 떠난다는 이야기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아이들을 돕거나 왕자의 눈에 들 만한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대신, 툴리는 마를로를 도우러 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툴리가 작별 인사를 위해 다시 나타나자 마를로는 자신이 잃어버린 젊음과 이제는 사라진 가능성을 한탄한다. “이건 선물이에요.” 그때 툴리가 마를로에게 말한다. 똑같은 게 반복되는 불가능할 듯한 일상성,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이 안전한 둘레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마를로가 선물한 것이다.

[툴리]는 내게도 선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왜 그 영화가 깊이 와 닿았는지 그게 내 비판적 태도를 슬쩍 벗어나 나를 세게 치고 갔는지 깨닫는데 오래 걸렸다. (나는 보통 집에서 아이들이 잠이 들고 난 짧은 시간 동안 일하는 TV 평론가다. 그래서 [툴리]를 좋아하는 게 그저 집을 떠나 나 혼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반항적인 기쁨 때문일 것이라 조금은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된 이야기와 동화처럼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결합한 게 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정말 훌륭한 양날의 검이다. 강력하고 신비한 존재가 찾아와 아이들도 아가씨도 남자도 아닌 ‘엄마’를 구한다는 동화이면서, 눈물도 터지고 숨도 턱 막힐 만큼 행복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이야기가 동화라는 것 자체를 아는 것도 있다. 툴리는 진짜가 아니다. 사실 뭔가 정말 잘못됐음을 나타내는 증상이다. 마를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것뿐이다. [툴리]가 잘한 것은 어머니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그걸 보여준 방식이 초월적이라는데 있다. 마치 존재의 본질을 다룬 존 던의 시를 소생시키고는 어울리지 않는 침과 고구마 퓌레를 덕지덕지 바른 것 같다.

내겐 이미 내 모습을 비출 거울이 있다. 내가 모성애 서사에 바라는 건 좀 더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까칠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까칠하다는 말도 틀렸다. 엄마가 된다는 건 눅눅하고 찐득거리고, 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다.) 감각에 근거한 사실주의도 결국엔 크고, 추상적이고, “이런 세상에 내가 사람을 하나 만들었어”라는 생각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놀라울 만큼 대단한 것과 평범한 것을 모두 잡아내긴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모성애 서사가 설득력 있고, 내가 더 많은 이야기를 보고 싶은 이유다. 그것이야말로 말로 가장 평범하면서 가장 엄청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on Vulture: The Beauty and Banality of Motherhood Stories Onscreen
© 2018 All rights reserved. Distributed by Tribune Content Agency

저작권자 ©테일러콘텐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